한줄 詩

나를 겨냥하다 - 안태현

마루안 2019. 9. 19. 22:31



나를 겨냥하다 - 안태현



내 안에 협곡이 있다
하루하루 얼굴이 사라진 행색으로 떠도는 무리들과 어떤 설화도 품을 수 없는 마른 강줄기들


저녁 식후 삼십 분
둥글고 긴 알약 몇 개를 손바닥에 들고 있으면


삭아 내리는 목조건물에서
홀로 서 있는 것 같다 어제까지 측근이었던 누군가 말없이 떠나버린 것 같다


시간의 못을 쳐서 너덜대는 지붕을 수리하고
바닥을 쓸어내리지만
감출 수 없는 냉기가
방으로, 부엌으로, 낡은 다락으로 나를 이끌고 간다


쓰러질 기미가 없는 그러니까 무쇠처럼 단단한 뿔을 가진 세월은 기다려주는 법이 없고
몇 번의 실패를 거듭하는 동안


나는 나를 마주 앉혀
삶의 지혜에 대해 갑론을박 토론을 벌인 적이 없다 뜻밖에 찾아오는 적막이 두려워
문을 열어둔 채 살았다


폐부에 총알이 박히는 느낌처럼 오늘이 순간적이다


나는 나를 겨냥하고 살았다



*시집, 저녁 무렵에 모자 달래기, 시로여는세상








누워서 하는 말 - 안태현



간밤에 마지막으로 마음에 두었던 것은 무엇이었나
병가를 내고
하루 종일 자리보전한 일이었나, 다시는, 다시는 그러면서 반복하는 헛된 다짐이었나


할 일 없이
천장만 멀뚱히 바라보는 나는 왜 할 일이 없나
왜 식물이 되어가는가


천천히 나를 그려가는 그림을 보고 있으면
시든 이파리 몇 개
요 몇 해 열매도 맺지 못하는 가지들이 부쩍 늘었다


삶은 담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이라는 말에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인 것 같은데


두 개의 나를 포개고 보면
담는 것도
비우는 것도 아니어서
어느 것이 미래에서 온 나인지 분간할 수 없다


내 안에도 곧은 심지가 있고 눈부시게 출렁이는 시간들이 존재할 텐데 나를 반성으로 이끈 것은 무엇이었나


누가 뭐래도
이때껏 사람이란 걸 지키면서 살아왔다고 자부하고 싶은데
하늘이 빙빙 도는
이 회오리 같은 증상은 사람의 어디에서 시작된 것인가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연을 자르다 - 이진우  (0) 2019.09.19
수명 다한 형광등을 위한 노래 - 하린  (0) 2019.09.19
코스모스 - 사윤수  (0) 2019.09.19
사춘기 - 오창렬  (0) 2019.09.18
구월의 이틀 - 류시화   (0) 2019.0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