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수명 다한 형광등을 위한 노래 - 하린

마루안 2019. 9. 19. 22:48



수명 다한 형광등을 위한 노래 - 하린



그 모든 걸 지켜본 건 형광등뿐이다


빈방에서 빈속을 달래느라 빈 병이 될 때까지 마셨고


불만에 찬 곰팡이가 장판 밑에서 스멀스멀 번식하는 걸 방치했다


어떤 날은 애인을 두고도 자위를 했다


몇 번의 졸업식이 끝나자 계집애들은 엄숙해졌고 미래는 변덕스러워졌으며 현재는 산만해졌다


난 마지막 거처인 나에게 한심하게 얹혀살았다


부재를 확인하기 위해 죽은 사람의 이름을 부르다 서글퍼졌다


심장이 허전할 때 긁지 말아야 하는 규칙을 또 어겼다


아무리 새로운 하늘을 끼워 넣어도 오늘의 창문은 늘 불편했다


형광등도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다크서클이 더 진해졌다


집착을 악착같이 허공에 버렸고 당신이 없는 방향에서 바람의 충고를 씹었다


돌려줘야 할 열쇠를 만지작거리다 끝내 돌아선 사람처럼


그리움은 속물적인 것이었다, 해가 뜨기 직전처럼 난 늘 각박했다



*시집, 1초 동안의 긴 고백, 문학수첩








꽃과 노인 - 하린



노인이 돌아볼 때마다 꽃은 숨을 참았다 


굽은 허리를 보며 꽃은 직립에만 집중한다 


무너지려는 자세를 들키고 싶지 않아서 노인은 꽃과 대화한다


한숨 더운 숨 거친 숨 끓는 숨


들숨과 날숨 말고도 인간이 가진 숨은 너무나 많다고


입장을 품고 숨이 번갈아 가며 찾아온다고...


꽃들은 매번 다른 무언가가 된다


꽃은 위로 꽃은 사랑 꽃은 내일 꽃은 목격 꽃은 당신


대답 없는 꽃은 피었다가 씨앗이 되었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했고


씨방 속에 할 말을 숨기고 있다고 노인은 끝내 믿었다


꽃잎들이 무덤처럼 수북했다


노인이 혼자 죽은 날, 꽃은 그제서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 


알몸으로 태어나 온몸으로 살다가 맨몸으로 죽어 간 여자가 여기 있어요
빨리 그녀를 꽃상여에 태워 주세요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빚 받아줍니다 - 김장호  (0) 2019.09.20
인연을 자르다 - 이진우  (0) 2019.09.19
나를 겨냥하다 - 안태현  (0) 2019.09.19
코스모스 - 사윤수  (0) 2019.09.19
사춘기 - 오창렬  (0) 2019.09.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