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빚 받아줍니다 - 김장호

마루안 2019. 9. 20. 19:41



빚 받아줍니다 - 김장호



세밑 차창 밖 풍경이 저물어가고
도심 육교에 나붙은 현수막에
내 눈길이 팍 꽂힌다


<빚 받아줍니다>


곰곰 생각해보면
세상에 빚쟁이 아닌 사람 없어


당신은 달콤한 빚쟁이
빚지곤 못산다며 큰소리쳤건만
결국 빚으로 빚을 돌려 막으며
내일을 담보로 어제를 겨우 돌려받았다


당신은 거룩한 빚쟁이
못난 자식 빚보증 섰던 농사꾼 아비
그만 빚의 덫에 걸려 도리 없이
문전옥답 다섯 마지기 날려버렸다


평생 벗어나기 어려운 빚
달이 가고 해가 가고 당신이 가도
빚은 이곳에 남는다
"빚보증 서는 자식은 낳지도 마라"
아비 말씀 아직 내 귓가에 남아 있다


제야의 종소리 울리기 전
빚의 목록을 찬찬히 분리수거해보면
누구든 청산할 빚 있다
누가 대신 받아줄 수 없는 빚 있다
강물에 새겨야 할 빚
돌에 새겨야 할 빚


버스가 네거리 신호에 멈추고
운전기사의 날카로운 쇳소리가
잠시 생각에 잠겨 내 귀를 잡아 흔든다
"손님, 버스비 아직 안 냈잖아요!"



*시집, 소금이 온다, 한국문연








한밤의 낙관 - 김장호



늦은 밤 가로등 밑 공중전화 부스
누가 남겼을까
전화기에 칠십 원의 낙전
꽃미소 같은,


한 통화 거저 생겼어
재수생 딸에게 전화를 건다
"아빠는 네 편이야, 끝까지 응원할게"
사랑한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늘 그 자리 눈길 닿는 곳에 있지만
오늘은 보이지 않던 공중전화 보였다
내 목소리를 잊지 않아서 고맙다
언젠가 사라질지 모르지만
여전히 널 의지하는 사람 있어 좋구나


예전에는 그랬다
빨간 공중전화기 앞에 줄서 기다렸어
딸깍, 동전 떨어지는 소리가
왜 그리 빠르고 크게 들리던지
동전 한 움큼 손에 쥐고 다이얼을 돌렸어
수화기를 연인의 어깨처럼 비벼대며
대학 합격소식을 들떠 외치기도 하고
수화기 너머 어미의 임종 소식도 들었다
요즘 공중전화 이용하면 무슨 일 난 줄 알지


야근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
휴대전화 배터리 방전된 나 또한
삶의 바탕화면에 꽃미소 하나 남긴다
한밤에 찍는 하루의 낙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