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철들기 좋은 시간 - 이성배

마루안 2019. 9. 16. 22:13

 

 

철들기 좋은 시간 - 이성배

 

 

추석 전날

아파트 외진 놀이터 벤치,

반백의 노인과 대여섯 살 됨직한 여자아이가 각자

전방을 주시한 채 말없이 앉아 있다.

 

노인은 담배를 피우고

여자아이는 왼손에 과자 봉지를 들고 있다.

 

바삭바삭한 웃음소리가

프라이팬의 기름방울처럼 아파트 베란다 밖으로 튀었다.

 

두 사람은

TV를 틀어 놓고 조용히 앉아

저녁을 먹은 후

아이가 갖고 싶어했던 열두 색 색연필을 사러 갈지도 모른다

 

유난히 낮이 길어

아이에게는 철들기 좋은 시간이었다.

 

 

*시집, 희망 수리 중, 고두미

 

 

 

 

 

 

생태공원 조성부지 - 이성배

 

 

제비 새끼들처럼 쉼 없이 재잘대며 온 동네를 뛰어다니는 아이들 덕분에

찔레꽃 피는 봄은 언제나 배경이었다.

 

상을 팔러 오는 사람,

화장품을 팔러 오는 사람,

그릇을 팔러 오는 사람,

면사무소 생활개선회에서는 마요네즈 만드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엿장수 리어카를 따라 개울까지 몰려갔던 아이들은

사과장수 트럭을 따라 윗동네까지 달음박질 치고

저녁 무렵 요란한 연기를 뿜는 방역차를 따라 엎어지고 자빠지고

울다가 웃다가 달이 높게 떠서야 숨바꼭질이 끝났다.

 

튀밥을 튀기러 오는 사람,

고추를 사러 오는 사람,

소를 팔라고 오는 사람,

선거가 있을 즈음에는 검정 지프도 조용히 마을로 들어왔다.

 

한곳씩은 털썩털썩 무너져

문화재 신청도 안 되는 빈 상자 같은 마을,

하루 세 번 마을버스가 먼지 풀풀 날리며 들어왔다가

한 번 멈추는 일 없이 바쁘게 돌아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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