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구월의 이틀 - 류시화

마루안 2019. 9. 17. 19:39



구월의 이틀 - 류시화



소나무숲과 길이 있는 곳
그곳에 구월이 있다 소나무숲이
오솔길을 감추고 있는 곳 구름이 나무 한 그루를
감추고 있는 곳 그곳에 비 내리는
구월의 이틀이 있다


그 구월의 하루를
나는 숲에서 보냈다 비와
높고 낮은 나무들 아래로 새와
저녁이 함께 내리고 나는 숲을 걸어
삶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나뭇잎사귀들은
비에 부풀고 어느 곳으로 구름은
구름과 어울려 흘러갔으며


그리고 또 비가 내렸다
숲을 걸어가면 며칠째 양치류는 자라고
둥근 눈을 한 저 새들은 무엇인가
이 길 끝에 또다른 길이 있어 한곳으로 모이고
온 곳으로 되돌아가는 모래의 강물들
멀리까지 손을 뻗어 나는
언덕 하나를 붙잡는다 언덕은
손 안에서 부서져
구름이 된다


구름 위에 비를 만드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 있어 그 잎사귀를 흔들어
비를 내리고 높은 탑 위로 올라가 나는 멀리
돌들을 나르는 강물을 본다 그리고 그 너머 더 먼곳에도
강이 있어 더욱 많은 돌들을 나르고 그 돌들이
밀려가 내 눈이 가닿지 않는 그 어디에서
한 도시를 이루고 한 나라를 이룬다 해도


소나무 숲과 길이 있는 곳
그곳에 나의 구월이 있다
구월의 그 이틀이 지난 다음
그 나라에서 날아온 이상한 새들이 내
가슴에 둥지를 튼다고 해도 그 구월의 이틀 다음
새로운 태양이 빛나고 빙하시대와
짐승들이 춤추며 밀려온다 해도 나는
소나무숲이 감춘 그 오솔길 비 내리는
구월의 이틀을 본다



*시집,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푸른숲








다시 찾아온 구월의 이틀 - 류시화



구월이 비에 젖은 얼굴로 찾아오면
내 마음은 멀리 간다
하루에 다녀올 수 있는 가장 먼 곳
오솔길이 비를 감추고 있는 곳 돌들이
저마다 다른 얼굴을 하고 있는 곳
내 시는 그곳에서 오고
그곳으로 돌아간다


그 구월의 하루를 나는 다시
숲에서 보냈다 그토록 많은 비기 내려
양치류는 몰라보게 자라고
뿌리보다 더 뒤엉킨 덩굴들
기억이 들뜨지 않도록 온 힘을 다해
누르고 있는 바위들 그곳에
구월의 하루가 있었다 셀 수 없는 날들을
타야만 하는 불씨가 있었다


얼마나 자주
이곳에 오고 싶었던가
그렇다, 나는 이곳을 떠나왔었다 그렇게도 오래
나 혼자 모든 흐름이 정지했었다 다만
어디서 정지했는지 알 수 없었을 뿐


어느 날 밤에는 이상할 정도로 머리가 맑아서
창에 이마를 대고 밖을 내다보았다
어떤 물결이 내 집 앞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별들은 집 뒤 습지에서 밤을 지새고
그때는 생각들이 온통 내 삶을 지배했었다
뒤엉킨 뿌리처럼 풀리지 않는 의문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나는 보이지 않는 계절을 살았다


아니다, 그것이 아니다
나는 그곳을 떠나온 것이 아니었다
눈을 돌리기만 하면 그곳에
비 내리는 구월의 이틀이 있다 비와 오솔길이
소나무를 감추고 있는 곳 쐐기풀이
구름에게 손을 흔드는 곳, 한때 그곳에
얼음에 갇힌 시가 있었다 내안에
불을 일으킨 단어들이 있었다
곤충들을 움직이게 하고
심장을 빨리 뛰게 하던 것이


구월의 끝에서 나비들은 침묵하고
별들은 흔들린다
그 구월의 이틀이 지난 뒤
비와 돌들의 입맞춤으로 파헤쳐진 길 위에서
눈먼 자가 지나가는 사람들의 등 뒤로 예언을 하고
곧 누군가 길에 떨어진 종이를 주워
그곳에 적힌 시를 읽으리라
다시 얼음에 갇힌 시를



*시집,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 문학의숲






# 류시화의 세 번째 시집 발문을 쓴 이홍섭 시인 말에 의하면 위 두 시는 30년 터울을 두고 쓰여졌다. 젊은 날에 썼던 구월의 이틀은 시인의 30년 방랑에서 제대로 숙성을 했다. 장정일의 소설 제목도 이 시에서 따왔다. 시를 읽다보면 여름의 막바지까지 그렇게 애타게 울던 매미 울음소리 잦아든 초가을의 시원한 바람 속에서 막연한 슬픔이 밀려 온다. 태풍도 지나 가고 명절도 지나고 눈물 나게 좋은 초가을이다. 구월의 슬픔은 딱 이틀만 느껴도 충분하게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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