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아무 데서나 별들이 - 전동균

마루안 2019. 9. 7. 19:58



아무 데서나 별들이 - 전동균



밥 벌러 온 동쪽엔 지진이 잦다


거미들이 분주해지면서
풀들이 쇠면서
나는 내 몸 냄새를 알게 됐지만


망치로 때려도 깨지지 않는
저녁의 거울 속엔
딱 하나만 더!
소주병을 품고 날듯이 모퉁이를 도는 까치 머리 옷자락이 펄럭인다


내 것이 아닌 게
내 것처럼 왔다가 떠나가는 동안
또 그것들을 맞이하고 배웅하는 동안


신발은 늘 젖어 있고
허리띠는 또 한칸 줄어드는데


아무 데나
아무렇게나 흩어져
제각기 제 빛을 내뿜는 나뭇잎들



*시집, 당신이 없는 곳에서 당신과 함께, 창비








그러나 괜찮았다 - 전동균



말이 잘 되지 않았다.
담뱃재만 쌓이고
책상 위엔 귀를 뒤로 눕힌 채
눈 깜박대는 토끼들.


그래도 괜찮았다.
나는 나의 바깥으로 걸어나갔다.
멀리 걸어나간 생각들은
불 같고 얼음 같은 공기를 숨 쉬었다.


길은 어디에도 없는 벌판에 서 있는 일.
천둥에 놀란 나뭇잎처럼
끊임없이 질문하는 일.


이마와 쇄골 드러난 어깨에
주문(呪文) 같은 빗방울이 떨어졌지만
아무것도 보이진 않았다.


잠깐, 먼 불빛이 비치기도 했다.
그때 내 모습이 여우로, 마른 물고기로
바늘엉겅퀴로 바뀌는 것 같았다.


그러나 괜찮았다.
나는 나의 배후를 만났다.
잿빛 풀, 물방울 새, 불타는 돌.






# 전동균 시인은 1962년 경북 경주 출생으로 중앙대 문예창작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1986년 <소설문학> 신인상 시부문에 당선되면서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오래 비어 있는 길>, <함허동천에서 서성이다>. <거룩한 허기>. <우리처럼 낯선>이 있다. <당신이 없는 곳에서 당신과 함께>는 그의 다섯 번째 시집이다. 2014년 백석문학상, 2019년 노작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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