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사랑은 살려달라고 하는 일 아니겠나 - 황학주 시집

마루안 2019. 9. 5. 09:04

 

 

 

황학주 시집은 늘 떨림을 준다. 이 시집은 그의 11 번째 시집이다. 그의 대부분의 시집을 다 읽었다. 대부분이라고 하는 것은 몇 권의 시선집은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첫 시집 <사람>에서부터 그의 시는 나와 코드가 맞았다.

기형도 시인의 유고집이 나온 무렵인가 보다. 그때까지 내가 읽은 시의 영역은 교과서에 나온 윤동주, 김소월, 서정주 정도였다. 조금 더 들어가도 서정윤과 박노해 시 정도였다. 당시에는 시집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기형도 시인이 있는 줄도 몰랐다가 유고집이 나오면서 그의 죽음도 뒤늦게 알았다. 그때부터 시에 대한 호기심은 바이러스 퍼지듯 하나씩 늘어났다. 그때 보신각 근처에 있었던 종로서적은 나의 안식처였다. 시보다 사회과학 책에 관심이 많았다.

 

보고 싶은 책을 맘껏 사지 못하는 아쉬움은 있었지만 수많은 책은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른 느낌이었다. 나의 유일한 중독인 활자 중독은 그때 시작 되었다. 시집 코너에서 고른 시집으로 하나씩 아는 시인들이 꼬리를 물면서 늘어났다.

 

그때 처음 산 황학주 시집이 <사람>이다. 외로움에 사무친 듯한 무언가에 굶주린 듯한 그의 시가 매끄럽게 읽혀지지는 않았다. 기형도 시가 어딘가 비현실(초현실)적이면서 어둡다면 황학주 시는 현실적이면서 어두웠다. 나는 그의 허무주의가 좋았다.

 

그의 시를 읽고 나면 슬픈 노래를 종일 들은 것처럼 마음이 쓸쓸해졌다. 그렇게 시인과의 인연은 시작됐다. 그리고 최근 따끈따끈한 그의 열한 번째 시집을 설레는 마음으로 펼쳤다. 늘 한 박자씩 늦는데 시집 나왔다는 소식이 왜 그리 반갑던지,,

 

제주도로 옮기고 처음 나온 시집인 듯한데 쓸쓸함이 묻어나는 시는 여전하다. 그는 참 여러 곳을 옮겨 다녔다. 서해안 포구에서 아프리카까지 바람처럼 머물다 떠나곤 했다. 풀밭을 찾아 떠도는 유목민처럼 그는 정들 만하면 서식지를 옮겼다. 

 

여전히 좋은 시로 가득하다. 이전의 시집을 중독된 혀로 허겁지겁 맛을 봤다면 이번 시집은 생수 한 잔으로 입을 헹구면서 맛을 봤다고 할까. 이제 나도 시 읽는 태도에 조금 여유가 생겼다. 많은 시를 읽기보다 좋은 시를 찾아 읽었기에 생긴 내공이다.

 

여태껏 쌓아온 그이 시의 특징이기도 한데 이번 시집에도 상실에 대한 회한이 가득하다. 그러나 그 쓸쓸함에 금방 젖어 들지 않는 담백한 슬픔이다. 좋아 하는 시인이 누구냐고 물으면 맨 먼저 황학주 시인이었다.

 

지금은 그런 걸 묻는 사람도 없지만 내 대답은 앞으로도 같을 것이다. 이유는 없다. 시인과 일면식도 없다. 꼭 이유를 찾자면 내가 산 첫 시집이었기에 그랬을 것이다. 좋은 시도 내가 발견할 때 온전히 인연으로 다가온다.

딱 내 마음 같은 싯구 몇 구절 훔쳐 옮긴다. <가족사진을 어디 흘린 줄 모른 채/ 그는 서랍 안에 지갑을 넣어둔다>, <벌금만 내고 그냥 돌아가고 싶은/ 겸연쩍은 사내를 본다>. 이 구절 만으로도 본전 생각 안 나는 좋은 시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