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슬픔에 대한 나의 혐의 - 이성배

마루안 2019. 9. 1. 16:29

 

 

슬픔에 대한 나의 혐의 - 이성배

 

 

방문을 열고 닫는 아주 잠깐 사이 알라바이는 깨졌다.

벽에 걸린 철 지난 옷가지들에 대해 묻는다면

지난날들은 본의가 아니었다.

이중으로 잠긴 창문은 먼지 냄새 심한 시간을 가두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물기 없이 자란 성장기를 부인하지는 않겠다.

나에게 유리한 진술이 있다면 이제

순진하게 사랑을 고백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슬픔에 대해 나는 고의를 부정한다.

빈방은 어떤 사람에게든 가장 우호적인 공간이다.

오래 열어보지 않은 서랍들과 장롱 속에는 이미 충분한

그리고 위험한 감정들이 개켜지거나 촘촘히 매달려 있다.

내가 걷고 있는 시간대를 긍정해줄 사람을 만나지 못한다면

세상과 나는 이미 서로 다른 배경이다.

거리를 배회하다 영화를 보곤 했던 환절기의 유행에 대해서는

고의가 아니었다.

다시 한번 나의 거처를 추궁한다면 나는

위장전입해 살고 있을 뿐이므로

슬픔도 주거 부정이다.

 

 

*시집/ 희망 수리 중/ 고두미

 

 

 

 

 

 

비장한 가족사 - 이성배

 

 

생활은 수시로 벗겨지는 경운기의 피대처럼 헛돌기만 했고 살아야 할 날들은 읍내 농협의 빚 독촉 같은 것이어서 밥 먹는 시간은 오랜만의 저축처럼 엄숙했다. 식구들에게 희망은 아무리 돌려도 TV 전파를 잡아내지 못하는 뒤안 안테나처럼 목청 터지는 불협화음이었지만 먹을 것이 부족했으므로 모든 문제는 간단명료했다. 밥상 앞에서 가장 위대했던 그는 때려 넣지 못하는 것이 없는 가장이었다. 짐은 때려 실었고, 아귀가 맞지 않을 때는 때려 박았고 두어 숟가락 남은 밥은 때려 넣었다. 나의 유년은 오래전 개설한, 잔고 없는 저축 통장. 가끔 엄숙함에 대하여 힘이 부쳤던 그녀는 수시로 먹어 치웠고, 빨아 치웠고, 팔아 치우는 것으로 연대보증 같은 삶을 원망했다. 국민학교 내내 화선지에 정직과 성실 두 글자를 쓰는 동안 세상은 농 밑에서 잔뜩 먼지 뒤집어 쓴 채 굴러 나오던 유리구슬처럼 비현실적으로 빛났다.

 

 

 

 

# 이성배 시인은 1973년 충북 괴산 출생으로 충북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9년 경찰관이 되어 현재 음성의 한 파출소에 근무하고 있는 경찰이다. <희망 수리 중>이 첫 시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