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더러운 인연 - 이진우

마루안 2019. 8. 31. 22:15



더러운 인연 - 이진우



산 자를 위한 벌초,

죽은 자에게 정원이 필요하다


발목이 푹푹 빠지도록 버려 둔,

그리하여 개미와 풀벌레와 뱀과 두꺼비의 집에서

망자의 정원이 된 묘지를

인연을 끊은 지 오래인 사람들이 찾아와 망쳐버린다


망자의 희미한 기억을 먹으며 잔디는 자라고

잔디 사이에서 잡초는 정원을 가꾸었다

전에 자식들을 키우느라 거칠던 망자의 손을 땅에 묻고

세운 집, 그 집 식구들이

아직 죽지 않은 채로

철거반원처럼 달려들어

망자의 정원을 짓밟을 때

묘비 옆에서 낫질에 동강난 누런 구렁이가

애써 몸을 곧추 세우려고 한다


삶에서 죽음으로 돌아가는 길이나

그 반대의 길에서도

또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견뎌야 하는 것이냐

폐허된 묘지의 정원 위로도 다시 달은 떠오르고

집 잃어 슬픈 풀벌레 소리 유정하리니


잊혀진 인연의 끈을 다시 묶지는 말지라

짓밟힌 정원에는 한숨만 동그랗게 쌓인다



*시집, 슬픈 바퀴벌레 일가, 세계사








物神의 오후 - 이진우



소원대로 너의 유품을 안고 갔었다

햇살이 죽어라 내리쬐는 여름 오후

북으로 뚫린 하늘엔 구름 한점 없었고

네 흙집 위엔 풀 한포기 없었다

도툼하게 쌓인 네 흙집 위에

소주 한 병을 뿌렸다

아무도 없어 좋았다


스물 일곱이었다

네가 마지막으로 엽서를 보내고

원대로 목 매단 때가

좀 더 폼나게 죽을 수 없을까

어떻게 하면 즐겁게 죽을 수 있을까 고민하더니


다시는 이 세상에 오지 마라

네가 오지 않는대도 우리가 네게로 가고 있다

지금 우리는 네게로 가기 위해

세상의 모든 빗장을 걸어 잠그고 있다

멀고 먼 윤회의 길이 폐쇄될 날도 멀지 않았다


몇 년일지 몇십 년일지 모르지만

따로따로 흙집을 찾아들지 않고

한꺼번에 네게로 가겠다

요란한 물신의 오후에,

한때는 따뜻했던 태양을 기억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