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러운 인연 - 이진우
산 자를 위한 벌초,
죽은 자에게 정원이 필요하다
발목이 푹푹 빠지도록 버려 둔,
그리하여 개미와 풀벌레와 뱀과 두꺼비의 집에서
망자의 정원이 된 묘지를
인연을 끊은 지 오래인 사람들이 찾아와 망쳐버린다
망자의 희미한 기억을 먹으며 잔디는 자라고
잔디 사이에서 잡초는 정원을 가꾸었다
전에 자식들을 키우느라 거칠던 망자의 손을 땅에 묻고
세운 집, 그 집 식구들이
아직 죽지 않은 채로
철거반원처럼 달려들어
망자의 정원을 짓밟을 때
묘비 옆에서 낫질에 동강난 누런 구렁이가
애써 몸을 곧추 세우려고 한다
삶에서 죽음으로 돌아가는 길이나
그 반대의 길에서도
또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견뎌야 하는 것이냐
폐허된 묘지의 정원 위로도 다시 달은 떠오르고
집 잃어 슬픈 풀벌레 소리 유정하리니
잊혀진 인연의 끈을 다시 묶지는 말지라
짓밟힌 정원에는 한숨만 동그랗게 쌓인다
*시집, 슬픈 바퀴벌레 일가, 세계사
物神의 오후 - 이진우
소원대로 너의 유품을 안고 갔었다
햇살이 죽어라 내리쬐는 여름 오후
북으로 뚫린 하늘엔 구름 한점 없었고
네 흙집 위엔 풀 한포기 없었다
도툼하게 쌓인 네 흙집 위에
소주 한 병을 뿌렸다
아무도 없어 좋았다
스물 일곱이었다
네가 마지막으로 엽서를 보내고
원대로 목 매단 때가
좀 더 폼나게 죽을 수 없을까
어떻게 하면 즐겁게 죽을 수 있을까 고민하더니
다시는 이 세상에 오지 마라
네가 오지 않는대도 우리가 네게로 가고 있다
지금 우리는 네게로 가기 위해
세상의 모든 빗장을 걸어 잠그고 있다
멀고 먼 윤회의 길이 폐쇄될 날도 멀지 않았다
몇 년일지 몇십 년일지 모르지만
따로따로 흙집을 찾아들지 않고
한꺼번에 네게로 가겠다
요란한 물신의 오후에,
한때는 따뜻했던 태양을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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