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등대는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 - 윤석정

마루안 2019. 8. 30. 21:26



등대는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 - 윤석정
-뭍에서 죽은 사람들은 별이 되고 바다에서 죽은 사람들은 갈매기가 된다



등대는 밤마다 먼 바다로 수신호를 보내고
귀가가 늦어진 어선들을 기다리는 것인가
몇 초 간격을 두고 짠 해수가 불빛에 엉겨 붙는다
등대는 소금기를 떼어 내며 서서히 바다로 나간다
종일 드나드는 뱃고동 소리에 멍해진 귀를 바닷물에 씻는다
밤마다 바람에 잔뜩 부풀어 오른 포말로 인하여
등대 주위에서 머물던 갈매기 떼와 별빛들이
포근히 잠들 시각
등대는 씻지 못한 한쪽 귀를 마저 씻으며
방파제 입구에서 수반 작업이 덜 끝난 어선을 비춘다
간혹 파도 소리가 지겨운 어부들이 마시다 남긴
빈 소주병에서 붕붕거리는 소기가 파도에 부딪친다
파도 소리는 한참 등대의 귀 끝을 꼬집는다
뭍에서 주검이 되어 흘러온 헛것들과
몇 해가 지나도 입항하지 못한 선명들은
꽉 입 다문 석화마냥 불빛에 엉겨 붙는다
어부들의 노래가 떠난 포구
등대는 먼 바다로 수신호를 보낸다
아까부터 젖은 귀를 수평선 쪽으로 기울이지만
별과 갈매기가 잠든 포구에서
등대는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



*시집, 오페라 미용실, 민음사








떫은 생 - 윤석정



봄이 왔다 나는 설익은 약속처럼 헤어지기 바빴다
꽃이 떨어진 자리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여린 감들
구부러진 길 끝에 앉아 나는 태양의 부피를 재곤 했다
내 심장에 수혈하는 햇살 바늘
여름부터 검은 바늘 자국이 따끔거렸다
아프지 않을 때만 감들이 보였는데
감들의 낯빛은 점점 태양을 닮아 갔다
새부리에 쪼인 감들은 유독 붉디붉었다
감들은 속곳을 전부 드러낸 채 떨어지거나
가까스로 공중에 매달려 있었다
새들이 빼먹지 못한 감씨가 얼핏 보이곤 했다
몸을 눈부시게 열고도 길에서 떠날 수 없는
반쪽짜리 생, 그 감은 한 번 꽃피자 입을 쫙 벌리고
뿌리에 달라붙은 눅눅한 어둠까지 감아올렸다
어둠은 점점 바깥을 달콤하게 부풀리며
심장에 몰려와 단단하게 여물어 갔다
눈이 내리자
쭈글쭈글한 감들이 서둘러 햇볕을 쬐러 나왔다
더는 빨아들일 어둠이 없어서 바깥을 컴컴하게 만들기 시작했는데
끝내 어둠에 덮여 어둠 속에 들어간 늙은 감들이
떫디떫은 심장을 남겨 놓았다
다시 봄이 왔다 나는 어둠을 빨아들이기 위해
가지 끝으로 옮겨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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