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배롱나무를 편애하여 - 김창균

마루안 2019. 8. 29. 22:51



배롱나무를 편애하여 - 김창균



동쪽을 포기하고 북쪽으로만 가지 뻗는 배롱나무가 있었지

햇감자를 삶아 저녁으로 먹으며

불을 켠다는 것은

옷 하나를 벗는 것이라 생각하기도 했지


멀리 있는 친구에게 배롱나무 한 그루를 바라보는 시간은

밥을 먹지 않아도 배부르다고 전화를 하려다 그만 두었다네


북쪽으로만, 빛의 반대방향으로만 가지를 뻗는 그대여

저 절벽을 각인하는 굴성(屈性)의 고집이여


발바닥 각질 벗기듯 저녁의 이마를 밀며

왠지 맛도 없는 눈물을 꾸역꾸역 삼키며

어떤 순간은 키득키득

몸매 매끈한 배롱나무 허리를 간질이기도 했다네



*시집, 마당에 징검돌을 놓다, 문학의전당








백일홍 등 뒤로 오는 어둠 - 김창균



더위 끝, 붉은 꽃 피는 줄 모르고 피었다

화상 입어 검은색 반 흰색 반인

국민학교 적 담임선생님 손등을

배롱나무 줄기에 겹쳐 놓으며

쉬이 오는 어둠을 견딘다

황급히 기둥 쪽 흰 부분만으로

일개미들이 줄지어 왔다가 가기를 수차례

마음만 오랫동안 두던 사람을 만났을 때처럼

낯이 뜨거웠던가

반대편에서 오는 누군가를

황급히 외면하는 얼굴들


붉은 꽃이 차츰 어두워져 자신을 탈색하는 시간


이국의 소수 종교로 개종했다는 옛 애인의 소식이

백일홍 꽃잎 날리듯 경황없다






# 김창균 시인은 1966년 강원도 평창 출생으로 강원대 국어교육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96년 <심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녹슨 지붕에 앉아 빗소리를 듣는다>, <먼 북쪽>, <마당에 징검돌을 놓다>가 있다.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