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정다운 사람처럼 - 박소란

마루안 2019. 8. 29. 21:40



정다운 사람처럼 - 박소란



화를 내는 것 굳게 팔짱을 끼고 성마른 등을 보이는 것


이제 막 하나의 심장을 받아 소용돌이치는 사람처럼 이별을 모르는 사람처럼


미안, 하면 눈물이 돈다 처음부터 미안을 기다려온 사람처럼 단지 미안만을
고개를 떨군 채 말없이 내민 손을 붙드는 것


비 갠 오후 성당 돌담길은 더없이 평온해
세상 마지막 인사인 듯


물기 번진 잎사귀를 매달고 걷는 것
바람이 살랑이고 슬며시 웃음이 고이고 잠시 잠깐 기도를 떠올리는 것


토라졌다 때마침 화를 푼 사람처럼
하늘의 표정은 맑고 사랑에 빠질 듯 자꾸만 찰랑거리고 모든 게 그만 괜찮아
괜찮아, 하면 눈물이 돈다


이별을 모르는 사람처럼 살아 이토록 정다운 사람처럼



*시집, 한 사람의 닫힌 문, 창비








원룸 - 박소란



비의 꿈을 꾼다


윗방이 이사를 오고 난 후 줄곧
장대처럼 굵고 거센 오줌 소리를 듣는다


밥을 먹으며 듣는다
잠을 자며 듣는다


침대에 누워
그 소리를 가만히 듣다보면 천장이 왈칵
쏟아져 내릴 것 같다 꿈은
흥건히 젖어 막무가내로 불어 어디론가 자꾸만 떠내려갈 것만 같다


지금쯤이면 그의 꿈도 흐르고 있겠지, 내가 오줌을 누면
우산도 없이 우리는 만나
꿈과 꿈은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한 채 인사를 나누겠지


누렇게 얼룩진 아침은 황급히 뒷걸음쳐 숨겠지


우리는 서로를 사랑할 수 없겠다
기어코
우리는 서로를 사랑할 수밖에 없겠다


그 사랑은 참 우습고 더러운 사랑
우리는 자주 거짓말을 하겠지 지그시 서로의 귀를 막으며


그래
아무래도 여긴 너무 따뜻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