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나를 위한 드라마 - 배영옥

마루안 2019. 8. 27. 19:51

 

 

나를 위한 드라마 - 배영옥

 

 

나는 한때 사람을 살았던 적이 있다


살아서 고통스럽던 기억은
쓸쓸하고도
달콤한 드라마 같다


어제는 단맛만 골라 삼키고
오늘은 쓴맛만 삼켰다


아파서
면죄부를 받았다
그러므로


나는 열린 결말을 누구보다 사랑했다


다음 생만큼은 시대의 요구에 적극적으로 응답하리라


전생에서 죽인 사람을
현생에서 다시 죽였다


화창한 대낮에
기억의 사막에
죽은 시체를 버려두었다


여행 가방에 까마귀 날개를 넣어두고
나는 한때 사람을 떠났다

 

 

*시집, 백날을 함께 살고 일생이 갔다, 문학동네

 

 

 

 

 

 

훗날의 장례식 - 배영옥

 

 

주인공인
나만 없을 것이다
벅찬 고통을 감당하기 어려워
일찍 떠났으므로
엉킨 실타래 같은
검은 부재의 바람이 불고
태극기 휘날리고
잿빛 비둘기들만 구구거리며 하늘로 날아오를 것이다
무거운 공기가
이제 진짜 안녕이라며
작별을 고할 것이다
새 없는 공중으로 검은 비가 내릴 것이다
한가한 사람들도 오지 않을 것이다
주인공인 나만 홀로
슬플 것이다

 

 

 

 

# 배영옥 시인은 1966년 대구 출생으로 계명대 문예창작과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1999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으로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뭇별이 총총>이 있다. 2018년 6월 지병으로 타계했다. <백날을 함께 살고 일생이 갔다>는 그의 1주기에 나온 두 번째 시집이자 유고 시집이다. 52년을 살다 간 시인의 생애가 시 속에서 맑게 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