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잠을 뛰쳐나온 한 마리 양을 대신해 - 유계영

마루안 2019. 8. 28. 22:19



잠을 뛰쳐나온 한 마리 양을 대신해 - 유계영



그때 아침 태양은
당신의 얼굴을 얼마나 자세하게 깨무는지
오줌싸개 천사의 발밑에 고인 동전처럼
얼마나 자세하게 외로운지


양을 대신해 깨어나는지


꿈을 질겅거리며 거리를 걸어가는 자들
크고 작은 전쟁의 병사들
가장 먼저 죽는 행운을 빌었지만


잠을 뛰쳐나온 한 마리 양과 함께
끝까지 살아남아 매매 우는지


태양이 가장 높이 떠오르도록 깨어나지 않는 나는
잠 속에서 애써 혼잣말중이다
난 살아 있지, 살아 있구나
외워놓지 않으면 잊어버릴 수 있는지


이 또한 양을 대신해


심연이라는 장소가 있다고 들었다
당신의 가슴에 손을 뻗어도 손톱 끝인데
그 많은 양들은 어디서 모았지?


젖은 속눈썹같이 얌전히 자라는 슬픔도 있는지
그렇게 빛이 드는 골목도 있는지
하루종일 아침인 어린양을 대신해



*시집, 이런 얘기는 좀 어지러운가, 문학동네








봄꿈 - 유계영



온종일 털었는데 네 개의 지갑은 모두 비어 있다


나는 꿈속에서 허탕만 치는 소매치기였으나
아무도 없는 무대에 올라 개망초처럼 흥겨웠다


빈 주머니들은 더 가벼워졌겠지
왼손과 오른손을 꽉 묶고 차분히 잠들겠지


겨울에 떠난 것들이 겨울로 돌아오지 않는 것을
뭐라고 불러줄까 생각하면서


낡은 것은 새것으로 새것은 낡아가고
모르는 것은 아는 것으로 아는 것은 모르게 되고


봄에도 그러겠지


장발장은 빵만 훔쳤는데 왜 십구 년을 갇혀요?
은촛대를 훔쳤을 땐 왜 용서받아요?


선생님은 왜 아무것도 몰라요?


나는 떠들지 말라고 말해주었다
손잡이가 떨어진 채로 들썩거리는 주전자들아
멀리 바람으로 날아갈 수 있는 죽음이 있다고 믿는
삶의 아둔한 속도로는
집오리 같은 시간 속을 영영 뒤뚱거리게 될 것


살아서 다시는 만나지 말자고
웃는 낯으로 침을 뱉고 돌아서는 사람들#


눈에서 태어난 것들이 눈으로 죽으러 돌아와
사흘 내 잠만 자다 나가는 것을 두고
슬픔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모르는 것은 끝까지 몰라두거라
어른 같은 아이는 귀엽지가 않으니






# 유계영 시인은 1985년 인천 출생으로 동국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10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온갖 것들의 낮>, <이제는 순수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얘기는 좀 어지러운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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