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불완전함에 대한 비판 - 최명란

마루안 2019. 8. 26. 19:59



불완전함에 대한 비판 - 최명란



달을 시기하는 건 같은 하늘에 사는 구름이고
꽃을 시기하는 건 같은 땅에 사는 나비다
큰 엉덩이로 모두 한 방향으로 서서 오리무중 가는 구름은
무리지어 갈수록 고독해도 달을 가리지 말아야 하며
쾌락에 잠시 몸을 맡긴 나비는
모든 것을 함축한 날갯짓이 더 강력해도
불완전한 꽃에게 빨대를 대지 말아야 한다
나비가 불량하다는 거 진즉 알았다면
구름에도 몽고반점이 있다는 거 알았다면
정체를 알 수 없는 내일을 향해
달은 하늘에 몸을 맡기지 않았고 꽃은 땅에 몸을 맡기지 않았다
봄이 짧아 서둘러 자란 노랑나비의 타락은 갈수록 늘고
구름의 목소리는 봐줄수록 커진다
관능을 위해 모이는 구름과 나비의 표정은 이내 흩어질 것
모든 것에게 시간은 부족하고 버리지 않아도 사라진다
주어진 인생 까불다가 간다



*시집, 명랑한 생각, 교보문고








애매한 표지판 - 최명란



잘 모르면 잘 모르는 것이 사는 일이라고
사는 일이 잘 모르는 반복이라고
혼자 어둠 속에서 도시락을 싸네
닭은 닭소리로 울고 개는 개소리로 짖네
놀고 먹고 자고 놀고 먹고 자고
반복이 대가를 낳네
아무래도 많이 쓰는 쪽이 먼저 망가진다고
모든 반복의 횟수는 이미 정해져 있다 하네
소리가 예뻐서 한참은 더 써먹겠다고 벅수가 말하네
나도 산다네 나같은 벅수도 산다 하네
선 채로 사는 일 하루가 몇 날인지 몰라도
밥그릇은 잘 알고 있다네
시간을 견디기 힘들 땐 가족이 제일이라고 세탁기가 말하네
아무래도 시간을 보내기엔 TV가 낫다 소파가 말하네
뭐래도 친구가 최고다 현관문이 말하네
이만큼 살아보니 형제만한 게 없더라 냉장고가 말하네
돈이 최고라고 자동차가 말하네
좋은 세상 혼자 살아라 이불이 말하네
똑바로 누워 보면 십년 젊어 보이고
엎드려 보면 십년 늙어 보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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