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마당을 건너다 - 곽효환

마루안 2019. 8. 26. 19:35



마당을 건너다 - 곽효환



그 여름밤도 남자 어른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여인들이 지키는 남쪽 지방 도시 변두리 개량 한옥
어둠을 밀고 온 저녁 바람이 선선히 들고 나면
외등 밝힌 널찍한 마당 한편에 모깃불을 피워놓고
저녁상을 물린 할머니를 따라
평상에 자리 잡은 누이와 나 그리고
막둥아! 하면 한사코 고개를 가로젓던 코흘리개 동생은
옥수수와 감자 혹은 수박을 베어 물고
입가에 흐르는 단물을 연신 팔뚝으로 훔쳐냈다
안개 같은 어둠이 짙어질수록 할머니는
그날도 마작판에 갔는지 작은댁에 갔는지 모를
조부를 기다리며 파란 대문을 기웃거렸고
부엌과 평상을 오가는 어머니는 좀처럼 말이 없었다
어둠이 깊어지면 할머니는 두런두런
일 찾아 항구도시로 간 아버지 얘기를 했고
마당을 서성이던 어머니는 더 과묵해졌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달과 별과 호랑이, 고래와 바다를 두서없이 얘기하다
스러지듯 평상 위에 잠든 아이들을
할머니와 어머니는 하나씩 들쳐 업고
별빛 가득한 마당을 건너 그늘 깊은 방에 들었다


그런 밤이면 변소 옆 장독대 항아리 고인 물에
기다림에 지친 별똥별 하나 떨어져 웅숭깊게 자고 갔다



*곽효환 시집, 너는, 문학과지성








마당 약전(略傳) - 곽효환



나무 울타리나 토담에 에워싸인 나는
갓 걸음을 뗀 꼬맹이들과 닭, 오리, 강아지의 놀이터이고
저녁엔 모깃불 올리고 멍석 깔고
온 가족이 둘러앉아 소박한 저녁을 먹는 식당이고
감자 옥수수 수박을 먹으며 담소를 나누는 사랑채였다


닭장과 개집, 외양간과 돼지우리가 있고
봄 파종의 시작점이고 가을걷이의 종착지였다
아버지와 어머니, 할아버지와 할머니
다시 그 아버지와 어머니가
걷고 넘어지고 일어서고 뒹굴고 뜀박질하고
나로부터 세상을 향해 무수히 나아가고
다시 나에게로 돌아왔다


태어난 아이를 맨 처음 맞고 알린 것도
품어 자라게 한 것도 나의 몫이었다
그 아이가 신랑 신부가 되어
수줍게 초례를 올린 결혼식장이고
그 신랑 신부가 늙어
회갑과 고희 잔치를 연 연회장이며
그렇게 한 세월 가고 망자가 된 그들을
먹먹한 가슴으로 떠나보낸 장례식장이었다


윷 놀고 널뛰고 떡메 치는
마을 사람들의 흥성거리는 잔치터이고
고된 농사일 잠시 멈추고
농주로 지친 몸을 달래는 휴식처였다
지신 밟고 농악 놀고 풍년과 안녕을 빌던 사람들
나는 그들의 처음이자 전부이고 마지막이었다
내가 그들이고 그들이 곧 나였다


먼 아버지 적부터 연년이 이어져 내려오다
이제 놀이도 잔치도 예식도 사람도 사라지고
존재마저 희미해진 내 이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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