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내가 없는 세상 - 장정일

마루안 2019. 8. 23. 22:52



내가 없는 세상 - 장정일



고추잠자리가 몰려다니는 흰 등대
풍뎅이가 기어가는 방파제
입이 쩍 벌어지도록 하품을 하는 수평선
누군가가 바람에 날려 가지 않게
자신의 밀짚모자를 한 손으로 꾹 누르고 있다


헤드라이트가 수분을 섭취하는 숲
경적을 울리자 갑자기 나타난 저수지
아코디언을 켜는 애인이 사는 마을
화투장에 흠집을 내는 도박꾼처럼
시인은 자신이 고른 말에 침을 바른다


달싹지근한 냄새를 풍기는 극장
트위터를 보고 몰려든 식당
벤치가 모자라는 공원
주인을 끌고 다니는 포메라니안
도시는 쉬지 않고 쌓이는 인내
새로 생겨나는 질병


고소한 양고기 냄새가 가득한 주방
욕실 앞에 떨어져 있는 팬티
창 안을 훔쳐보는 붉은 데보시아나
대낮에 하는 두 남자의 섹스
이 모든 것이 보기에 좋지 않은가?


오, 빨리 사라져 버려라
나는 사라져 버려라
내가 없는 완벽한 세상
내가 없으면 더욱 아름다운 세계!



*시집, 눈 속의 구조대, 민음사








얼굴 없는 사랑 - 장정일



얼굴 없는 여자들, 헤아일 수 없이
많은 얼굴 없는 여자들이 내
다리 사이를 지나갔다
뒷통수만 잠깐 보여 준 여자들


아직 내가 남자가 되지 못했던 소년원 시절
나의 뒷통수를 두 손으로 지긋이 내리누르는
웃음 띤 남자들이 있었다 나는
다리 사이의 천사였다


대장들의 성기에서는 권력의 냄새가 났다
나는 끌리듯이 그 힘을 탐닉했다
얼굴 없는 여자들이 그랬듯이
대장들의 정액을 위장 깊숙이 삼켰다


발가벗긴 삼각형은 밤마다
대장이 던져 준 크림빵 봉지를 뜯었다
희고 고소한 크림을 찍어 항문에 발랐다
그들은 한 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대장은 권력을 행사했고
소년은 그와 하나가 되고 싶었다
힘을 나눠 갖고 싶었다
소년의 마음을 알아차린 대장은
오른손에 감아쥔 전선줄로 소년의 엉덩이를 때렸다


아파요!
더 때려요!
사랑합니다!


얼굴 없는 대장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얼굴 없는 대장들이 나에게
복종과 폭력을 가르쳤다
아직 우리가 남자가 아니었을 때






# 영영 시집을 낼 것 같지 않던 시인이 28년 만에 시집을 냈다. 누구의 발문도 해설도 추천사도, 거기다 시인의 말도 없이 오직 시만 실렸다. 여전히 읽어 내기가 매끄럽지 않고 모래 씹힌 듯 불편하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그 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