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나비 - 서광일

마루안 2019. 8. 23. 23:15



나비 - 서광일



떠나고 싶은데 사람들은 날 조용히 부른다


슬그머니 그림자 안쪽에서 반짝이는 눈빛
어슬렁 뒤따라오는 불규칙한 발자국
느닷없이 골목을 꽉 채우는 숨소리
후다닥 계단 아래 몸을 숨기는 뒷모습
빠직 숨을 죽이며 깨지는 유리병
밤새 장난감처럼 해부학실의 개구리처럼
가죽이 벗겨지거나 분해되는 수도 있다


배시시 사람들 사이에서 수줍어하거나
멈칫 가벼운 접촉에도 온몸에 힘을 주지만
요새 부쩍 살 빠진 것 같다는 소리도 듣는다
옥상에서 알 수 없는 체조 같은 걸 하고
남의 집 앞에 쪼그려 앉아 침 뱉고 담배 펴도
옆집에 사는지 길 건너인지 분간할 수 없다
불쑥 마주쳐도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다


눈감고 누우면 어디선가 들려오는 외마디
둔탁한 것에 부딪힌 건지 둔탁한 게 부딪친 건지
소리의 주인은 혼자인지 혼자가 아닌지
무엇보다 분하고 치가 떨리는 건
병들고 버려져 굴러들어 온 유기견처럼
눈치나 보다가 지하 창고에 갇혀 굶어 죽거나
쥐도 새도 모르게 거리에서 사라지는 일
조심조심 사람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이동한다


난 길고양이고 사람들은 날 나비라 부른다



*시집, 뭔가 해명해야 할 것 같은 4번 출구, 출판그룹 파란








엄습 - 서광일



온몸이 눅눅하다
눈가의 주름살을 따라
여행하는 발뒤꿈치에서
물비린내가 난다


비만 들이치지 않으면
둥글게 몸을 말고
잠을 모으기 위해
번데기처럼 오므리는 노숙인들


하수구에 물이 넘친다
그 많은 아문 자국들
퉁퉁 불어 터진 죽음의 근접들
떠다닌다 주룩 흘러내린다


뼛속으로 차오른 환멸을
몸 밖으로 밀어내
껍질을 만들고 딱딱해지면
날개 비슷한 게 돋아날까


조만간 나는
가지 끝에 매달려 있을지 모르겠다
눈물이 몰라보게 싱싱해진다
연명하기 좋은 계절이다






# 더위가 한풀 꺾여 아침 저녁으로 바람이 제법 서늘해졌다. 연명하기 좋은 계절이다. 위 두 시를 반복해서 읽으며 이 시인이 얼마나 시를 잘 쓰는지 탄복한다. 무협지에 나오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무영 무사처럼 드러나지 않으면 어떠리. 나 혼자 실컷 시 읽는 재미를 느낀다. 이런 시는 아무에게도 알려 주고 싶지 않다. 난 사람이고 가끔 사람들은 날 짐승이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