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잔치국수 한 그릇은 - 김종해

마루안 2019. 8. 23. 22:42



잔치국수 한 그릇은 - 김종해



어머니 손맛이 밴 잔치국수를 찾아
이즈음도 재래 시장 곳곳을 뒤진다
굶을 때가 많았던 어린 시절
그릇에 담긴 국수 면발과
가득 찬 멸치육수까지 다 마시면
어느새 배부르고 든든한 잔치국수
굻어본 사람은 안다
잔치국수 한 그릇을 먹으면
잔치집보다 넉넉하고 든든하다
잔치국수 한 그릇은 세상을 행복하게 한다
갓 삶아 무쳐낸 부추나 시금치나물,
혹은 아무렇게나 썰어놓은 김장김치 고명 위에
어머니 손맛이 밴 양념장을 끼얹으면
젓가락에 감기는 국수 면발이
입안에 머물 틈도 없이
목구멍을 즐겁게 한다
아직 귀가하지 않은 식구를 위해
대나무 소쿠리엔 밥보자기를 씌운
잔치국수 다발
양은솥에는 아직도 멸치국수가 뜨겁다



*시집, 눈송이는 나의 각(角)을 지운다, 문학세계사








곡비(哭婢)가 왔다 - 김종해
-고층 아파트까지 날아온 매미 한 마리



어머니 장례식날 이후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방성대곡(放聲大哭)해 본 적이 없다
그날 몸 속에 남아 있는 마지막 슬픔의 한 방울까지
다 짜내어 울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새로 생긴 슬픔을
가장(家長)의 이름으로 감추어 두었기 때문일까.
나를 알고 있는 그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목놓아 울고 싶은 날이 있었으련만
가장이라서 나는 그럴 수 없다
아침 식탁에 앉아서 숟가락을 들고 있을 때
문득 그가 왔다, 곡비(哭婢)가 왔다
여름의 끝자락을 쥐고
고층 아파트의 방충망을 붙들고
천지가 무너지듯 그가 울었다
한바탕 통렬한 울음이 계속될 동안
창문 안을 들여다보며 그가 흐느껴 울 동안
지금까지 가슴 속에 감춰둔 내 슬픔도
그의 호곡 하나하나에 사설을 붙였다
여름의 끝자락을 쥐고
내 슬픔을 알고 있는 그가 와서
나 대신 소리쳐 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