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철없는 내 사랑은 무정란이어도 좋았다 - 이원규

마루안 2019. 8. 22. 19:39



철없는 내 사랑은 무정란이어도 좋았다 - 이원규



마치 씨암탉이 알을 품듯이
천둥벼락이 쳐도 누군가를 품는다는 것은
누가 뭐래도 목숨 걸만한 일


닭벼슬에 철철 피 흐르는 사랑은
이미 오래 전에 끝장났지만
우리 집 암탉은 진신사리 여섯 개의 유정란을 낳았다
행여 줄탁동기의 때를 놓칠 새라
스무하루 결가부좌 하더니
다섯 마리 햇병아리를 세상 밖으로 불러내
새가 아닌 닭의 운명을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아직 열리지 않은 방 안에는
닭알인가 새알인가 폐사한 알이 하나
그런 줄 뻔히 알면서도
날마다 누군가를 품는다는 것은
지구 알에서 태어나 해를 품고 달을 품고
다시 알 하나 품는다는 것은


유정란을 포기한 동성애자처럼
천둥벼락이 쳐도 일단 품어본다는 것은
다시 닭벼슬에 철철 피가 흐르는 일


철없는 내 사랑은 무정란이어도 좋았다



*시집, 그대 불면의 눈꺼풀이여, 역락








참회도 없이 - 이원규



내게 아직 두 다리가 있어
나처럼 늙어가는 당신을 찾아 헤매는
겅중겅중 타조 같은, 두 손이 있어
당신을 오래 품을 수 있는, 두 눈이 있어
노안의 당신을 먼저 알아보는, 코가 있어
당신의 냄새 당신의 주파수를 찾는
능소화 같은 두 귀가 있어


보랏빛 스카프를 휘날리던 휘파람소리
당신의 흰 목덜미를 간질이던 강아지풀


추억의 허방다리 짚으며
딴 손의 딴 눈의 딴 입의 딴 귀의 딴 코의
여전히 엇갈리는 딴 마음이 있어
옛 애인의 집 파란 대문 앞에서
보고 싶다 생각하기도 전에 뒷걸음질 치면서도


내게 아직 선명한 당신의 몸 지도 한 장 남아있어
참회도 없이 당신의 혀를 아는 입이 있어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가 없는 세상 - 장정일  (0) 2019.08.23
잔치국수 한 그릇은 - 김종해  (0) 2019.08.23
세상 밖으로 우수수 - 김사이  (0) 2019.08.22
상사화 피다 - 전태련  (0) 2019.08.22
은둔자 - 하린  (0) 2019.0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