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상사화 피다 - 전태련

마루안 2019. 8. 22. 19:17



상사화 피다 - 전태련



잎이 꽃을 만나는 찰나
잎이 꽃을 보았을까
꽃이 잎을 보았을까
삶이 죽음의 얼굴을 본 순간
더 이상 삶이 아니듯
기다리던 꽃은 잎이 지고 나서야 찾아왔다


저녁놀이 아침놀을 만날 수 없듯이
자정이 한낮을 모르듯
잎을 보지 못한 채
담장 밑 상사화 피었다


포기하고 돌아서 가고 나면
그때야 찾아오는 그리운 것들
잎맥이 마르도록 기다렸건만
기다림은 늘 마지막 몇 분이 모자라는 것을
몇 해 거듭되는 숨바꼭질에 지친 꽃
얼굴이 해쓱하다


지구 반대편에서 잎을 내는 그대
서로 어깨 한번 스치는 일 없이
나는 여기서 꽃 피우네
내가 이 행성을 다녀가는지
그대는 눈치 채는가



*시집, 바람의 발자국, 문학의전당








땡볕 - 전태련



수도꼭지 잠그듯 꽉 비틀어도
남은 아픔 똑, 똑 떨어질 때
슬픔이란 밥상 차려 눈물 한 방울씩 떠먹는다
세상의 모든 밥이 그 안에 있는 것을


어릴 적 대청마루에서
낮잠을 자고 일어났을 때
들녘을 돌아오는 낮닭의 긴 울음꼬리에 얹혀
느닷없이 찾아온 슬픔은
자꾸 그 밥상머리에 나를 끌어다 앉힌다


그날처럼 삶의 변방 위로
땡볕만 내리쬐고
세상의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슬픔이
나를 찾아오면
그를 맞아 한 상(床) 배 불린다


창밖,
품이 큰 나무
깊은 그늘 짓고 서 있다






# 전태련 시인은 경북 칠곡 출생으로 대구가톨릭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2003년 <사람의문학>으로 등단했고 한국작가회의, 대구시인협회, 대구가톨릭문인회 회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