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은둔자 - 하린

마루안 2019. 8. 21. 22:12



은둔자 - 하린



지하실이 나의 신앙인 것은 매우 적절하다
층간 소음은 생각을 제거하기에 충분하고
집주인의 도덕과 윤리는 흡착률이 좋다


본능적으로 우린 지하실에서 지하실을 잊는다
고상한 천장을 상상하며 창문을 쳐다보지 않는다


위층 여자를 나는 이불 삼아 덮는다
여자의 꿈이 내 안으로 스며들 때까지
불면 위에 불안을 포갠다


산다와 살다와 살아지다의 차이점을 알려고 할 필요없다
그 모든 것은 악몽으로 치환되고,


날짜와 시간을 알리는 사물을 버리지 못한 것에 대해
암막 커튼을 치고 모든 소리 잠그지 않은 것에 대해
꿈속에서 후회한다


미세한 꿈틀거림만 있어도 독백은 나를 참견한다
어둠을 적당히 방치할 순 없는 건지
방치를 끝까지 사랑할 순 없는 건지


친애하는 은둔이여!
내일은 하루 종일 비가 되어 내리길
무작정 쏟아지길...


나를 완벽하게 은닉하기엔 손바닥 만한 창은 충분하지 않고
나를 호출하기엔 신들은 한가롭지 않으니
쇠창살처럼 단호하게 아름답게 꽂혀 주길...



*시집, 1초 동안의 긴 고백, 문학수첩








동반 - 하린



세 사람이 죽기 위해서 지불한 비용은 5,900원
3.3킬로그램 연탄 한 장과 수면제 한 통
12시간 지속된 장례 절차는 친절했다


토하지도 벽을 긁지도 않은 채 꿈은 지속됐다


첫 번째 남자는 내가 모르는 남자다
두 번째 여자는 내가 아는 여자다
세 번째 여자는 내가 모르는 척해야 할 여자다


항상 이런 식이다
최초의 형상은 의문투성이고
스팸 파일처럼 누군가 꼭 끼어든다


나에게 남은 것은 소문이 될 나의 행방일 뿐


지금 내 앞에 관이 세 개나 놓여 있다
누구부터 잘못되었나 추궁하기엔 사흘이 너무 짧다


첫 번째 남자는 내가 모르면서 알아야 할 남자다
두 번째 여자는 내가 아는 만큼 모르는 여자다
세 번째 여자는 내가 모르는 척하는데 가까이 와 있었던 여자다


그들에게 남은 건 이제 시간이 아니라 공간
땅을 열어 나를 먼저 묻어야 한다


죽음엔 지불해야 할 관계가 너무나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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