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파멸을 탐하다 - 이윤훈

마루안 2019. 8. 21. 21:41



파멸을 탐하다 - 이윤훈



텃밭의 자두나무는 내게 나무 그 이상의 것


가지가 휘도록 달린 것들이

빛의 변주 속에 커 가기 시작하면

하늘 가까이 달린 것은 내게 늘 그리움 같은 것


몇몇은 서둘러 풋것을 따가고

몇몇은 손에 닿는 것을 입에 넣고


대나무 장대를 벗어난 것은

날개 달린 풍뎅이나 찌르레기들의 오찬


높은 바람을 삼키고 검붉을 대로 붉은

농익은 끝

두려움 없이 자신을 놓아버린 그

탐스러운 것


이른 아침 나는

나무 밑 이슬 젖은 풀 속을 더듬어

가슴 떨림으로 그 파멸을 탐했다



*시집, 생의 볼륨을 높여요, 문학의전당








잿빛 눈물 - 이윤훈



우물가 한 구석 버려진 숫돌

그 캄캄한 속

아직도 쓱쓱 칼을 가는 소리가 들린다

아직도 흘리는 잿빛 눈물이 보인다


그 눈물에 날을 세우는 사내

제 눈물에 제 생의 날을 가는 것이다


베고 베어도 어둠은 무성한 검은 풀

낫을 갈 때에만 눈물을 흘리는 사내

날을 세우기 위해 냉가슴이 되어야 했던 사내

아예 숫돌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숫돌을 쓰다듬는다

사내의 마른 눈물이 손에 묻는다






*시인의 말


살아, 남아 있음이 더 외롭다.


얼굴에, 목소리에 슬픔을 묻히지 않으려 흐드러지게 웃었다.

어쩌면 죽도록 더 위로워야 한다.


바람이 인다.

세상의 거친 면에 가슴을 확, 문지르고 싶다.


성냥 한 개비를 긋는다.

아, 한 줌의 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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