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옥상의 스핑크스 - 김수우

마루안 2019. 8. 11. 19:16



옥상의 스핑크스 - 김수우



쓸쓸한 분노도 그예 쭉정이고 말 때 옥상으로 간다
깃발이 걸레만 할 때 슬리퍼를 끌고 옥상으로 간다
마침내 당도한 듯


항해, 나침반, 자유 등의 단어가 새로울 때
단어들이 낯설 때도 녹슨 난간 붙들고 옥상으로 간다
마침내 출발한 듯


늙은 세발자전거가 신전의 마차처럼 놓인
옥상에선 모든 광장이 밥그릇만해진다 밀실도 밥솥이 된다
북두칠성과 상추화분이 함께 논다


부산 산복도로엔 무럭무럭 옥상이 자란다
옥상은 밥풀 묻은 피라밋, 눈물 넘치는 스핑크스가 바다를 기른다
동해와 남해를 새푸르게 풀어 놓는다


사랑이 천천히 저물 때 옥상으로 간다
철학사전도 예언서도 거품이 될 때 옥상으로 간다
마침내 잊혀진 듯


거기서 빨래를 넌다 상춧잎을 뜯는다



*시집, 몰락경전, 실천문학사








첫길 - 김수우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
아무도 그립지 않다


모퉁이를 돌면 헌책방이 있고
그 옆에서 옛 영웅의 동상이 종일 늙어가고
그 앞에 버스가 선다 닳은 틀니처럼 덜걱덜걱 버스가 모퉁이를 돌면
그 옆에 글씨 지워진 혁명탑이 주저앉아 있고
그 앞에 간판 없는 가겟방이 저물고
저만치 헌책방이 전등을 켠다


도착도 출발도 한 자리구나
사랑도 기다림도 한 시간이구나


배회는 영원의 벼랑을 밀고 간다 광막한 순간의 변압기를 올리면 죽음 한 벌 펄럭이는


결국 돌아올 곳임을 알기에
배회는 모든 앞과 옆을 믿는다 무지를 믿는다 가난도 자유도 믿는다
모통이를 돌면 양파 수레가 휘뚤휘뚤 바람을 밀고
그 앞에서 양동이의 꽃들이 햇살을 밀고
그 옆에 해골이 영원을 민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아도 광장은 넓고
아무도 그립지 않아도 엽서를 산다


배회 속에서 태어난 것들이 배회하는 동안, 그걸 사랑이라고 부르기 위해 애쓰는 동안
한 해골이 봉지땅콩을 팔고 있다






# 김수우 시인은 1959년 부산 출생으로 경희대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5년 <시와시학>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시집으로 <길의 길>, <당신의 옹이에 옷을 건다>, <붉은 사하라>, <젯밥과 화분>, <몰락 경전>이 있다. 부산작가상, 최계락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사진에도 조예가 깊어 울림을 주는 사진 산문집도 여러 권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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