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느닷없이 - 조유리

마루안 2019. 8. 9. 21:52



느닷없이 - 조유리



누구나 간혹 겪는 일이겠지만
느닷없이 들이닥칠 때 느닷없다
화창했던 날씨에서 느닷없이 우박이 쏟아져
주차 중인 자동차 범퍼가 느닷없는 봉변을 당했을 때나
후불제 교통카드를 찍었는데 잔액이 모자란다고
느닷없는 난감에 쳐했을 때나


정말 느닷없게 닥치는 일은 그런 것이 아니지
산사람 부고


죽은사람으로 여겨달라고
그동안 고맙고 미안했다고 세상 가장 긴 부고문이
느닷없이 카톡을 쳤을 때
바람에서 사흘 전 먹은 순대국밥 냄새가 났던가
대구포 냄새였던 것 같기도 한데


맑은 하늘에서 굵은 눈발 날리다
느닷없이 말짱해진다


하필 오늘 아침 여러 해 실패했던
보라색튤립이 피었지
쩍쩍 갈라진 화분을 뚫고


살아 돌아왔다는 꽃이나
죽어 살겠다고 하는 사람이나


느닷없게도



*시집, 흰 그늘 속 검은 잠, 시산맥사








음절마다 불협화음 이는 악보에서 비가 내릴 때 - 조유리



노천에 뜨거나 흘러 다니는 음표들
멀리서 도착한 당신들은 가늘고 길다
아랫단이 축축하다
종아리를 걷어붙이고 남은 한 손으로
받아내는 빗방울들이 어디론가
떠날 생각으로 바쁘다


물 한 줌 속에 옆얼굴을 빠뜨린 채
세 시간만 친구가 되어 줄래요?
수로를 비끄러매며
빗물로 고이는 안국역 6번 출구


어디론가 발걸음이 휜다
댓살이나 알루미늄 돛을 툭툭 부딪치면서


머리맡의 방주가 닮았구나
생각하지만 서로에게 말을 걸지는 않는다


지붕을 이고도 머리카락이 젖는 노래를 불러본 적 있느냐고


물어보려다가 입간판이 연주하는 관현악 독주에
지붕만 한 깊이로 이마에 차양을 치는


당신이나 당신들이나 뒤통수가 파 놓고 간 물구덩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