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햇빛과 먼지와 황무지와 그리고 - 김태형

마루안 2019. 8. 11. 19:05



햇빛과 먼지와 황무지와 그리고 - 김태형



그러니까 황무지란 아무것도 없는 곳이어야 한다
뜨거운 햇빛 아래 잠시 서 있는 것도
함께 같은 지평선을 오래오래 바라보는 것도
서로 딴 생각에 눈감고 있을 뿐인 것도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구름을 바라보려고 했다
오늘밤에 별을 볼 수 있을지
저편 하늘을 애써 헤아리려고 했다
얼마만큼 왔으며 또 내일은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
이름이 무엇이고 그래서 이런 것이라는
온갖 것들에 휩싸여 있었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로만 가득했다
차 안에서 불편한 엉덩이를 탓하고
발 뻗을 자리를 구하고
잠시 너를 생각하고 누군가를 미워하고 잊으려 하다가
다시 사악한 영혼처럼 사로잡혀 있고
햇빛과 먼지와 지나가는 트럭과 낙타와 길을
냄새와 역거움과 어떤 황폐함을
그리고 또 편안한 잠자리를
이 모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정작 나는 찾아가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런 게 나였고 이 지긋지긋한 삶이었고
한 점 붉은 먼지로 돌아가
온 세상을 이루는 것이었을지도
그러니까 황무지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야 한다



*시집, 고백이라는 장르, 출판사 장롱








고백이라는 장르 - 김태형



누구도 저 야윈 어깨를 열어보지 않았다
창틀은 내내 얼어붙어 있었다
무슨 소린가 들린 듯했지만
유리창 안에 맺혀 있던 물방울이 흘러내려 다시 얼어붙고만 있었다
자기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없다
뒤돌아선 그마저도
닫혀 있는 어둠을 들여다보지 않았다


누가 다가오기라도 할까 싶어
햇빛에 못을 박았다
먼지 낀 햇빛이 녹아내리자 지평선 하나가 바닥을 질질 끌고 갔다
지우려 할 때 지우려 했던 것만이 가장 선명했다
빠르게 기억으로 돌아가려는 듯이
모든 것이 투명해지고 있었다


한동안 사용했던 공용어는 사라지고 절벽이 하나 새로 생겨났다
마른 허공이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
다른 말들이 절벽을 지우며 들려왔다
실핏줄이 모여들어 검은 눈동자를 만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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