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축산항, 그해 여름 - 정훈교

마루안 2019. 8. 2. 22:16



축산항, 그해 여름 - 정훈교



시동을 끄는 사이
그녀는 이쪽과 저쪽을 이어주는 다리를 건넜다
바다와 강이 만나는 삼각주에 있었고
작은 어촌인데도 조명은, 유원지 모텔 불빛들이 강에 내린 것처럼
질퍽했다
교회 첨탑을 노을이 숨 가쁘게 넘고 있었고 가로등이 층층이 켜지는 중이었다
그녀가 지나간
다리는 울렁거렸다
눈이 가닿지 않은 다리 밑에는,
희멀겋게 배를 내놓은 사내,의 텐트가 적막을 걷고 있었다
썰물 때마다 파도가 출렁, 사내의 잠을 움켜쥐곤 했는데 더러
얇은 바람소리가 내면을 스치느라 정박하기도 했다
그녀가 바다로 달려들어
푸른 청춘을 한입 베어 물었다
물컹,
다리가 잘려나갔고
파도에 실려 온
치어들이 허연 배를 드러내며
모래사장으로 나자빠졌다


그녀 발자국을 지운, 파도가
다리에 닿을 때마다 길게 물그림자가 졌다


우린 밤새
다리와 다릴 건너며 물그림자를 지웠고,
오래 울렁거렸다



*시집, 또 하나의 입술, 문학의전당








너, 장마 후 - 정훈교



며칠째 아우성이다


때론, 불편해도 사랑은 사랑이다


파문을 그리며 수면에 지나온 날을 기록하는 것도
늙은 사랑이다


창문에 달라붙은 고요를 한참이나 털어내는 일도
늙은 사랑이다


만질 수 없어도 천둥과 번개가
비의 연적(戀敵)이듯


어쩌면 폭우를 받아내는 강보다
비를 받아내는 당신이


더 빨리 흩어질지도 모를 일


바람의 등을 타고
처마 끝, 수많은 사랑이 떨어진다


골목 언저리마다 아우성인,
꽃잎들


한바탕 앓고 나면
사랑도 꽤 눅눅해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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