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그럴 나이가 되었다 - 조항록

마루안 2019. 7. 30. 19:59



그럴 나이가 되었다 - 조항록



남은 시간으로 뭘 해야 할까요?
간밤에 보았던 환영을
당신이라고 믿어도 될까요?
서랍을 다 열어놓고 뒤져보아도
더는 흥분과 과장이 남아 있지 않은데
커다란 가방을 들고 사라진 사람들은 어디에 갔을까요?


거센 바람이 나뭇가지를 부러뜨리는 숲속에 가면
모든 다툼이 간혹 사랑의 노래로 들려요
파멸이 닥쳐도
호들갑떨지 않겠다는 것인데
내 마음 나도 모르게 오늘보다 내일을 먼저 지워요
언제나 머무르는 것은 어제
지워지지 않는 어제의 오늘과 내일


오래된 식당에 들어서면 메뉴에도 없는 음식 냄새가 나요
누구는 그걸 세월이라 하고
업이라 하고
어쨌거나 일말의 세계에서 벌어졌을
심심한 사건들의 발효라 하고


나의 가슴은 2만 개의 달을 삼켰어요
두근거리지 않아요
많은 것이 오래된 일이 되어버렸어요
뜨거운 저녁밥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공허처럼
질문이 많아지는 때


좁은 창문 밖에 늦여름이 등허리를 진 채 앉아 있어요
눈앞에서 놓친 것보다 뒤편으로 지나간 것들이
몹시 그립기도 해요
소나기 쏟아지던 날 전파사 처마 밑에서 우연히 들었던
노랫말을 모아놓으면 한 권의 예언서가 되었을까요?
외국어를 공부하는 아이들을 쳐다보며
모국어를 잊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그러면 어떤 언어로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진심을 이야기할까요?


거짓말과 변명도 마침표를 찍어야 할 순간이 있어요
그 마침표를 다 모아
영혼을 가득 채워야 하는 때가 있어요
쉽게 부서지는 당신을 주머니에 넣고 걷겠어요
꿈인 듯 또 꿈인 듯
돌이킬 수 없는 일만 바라보겠어요



*시집, 눈 한번 감았다 뜰까, 문학수첩








우울을 보다 - 조항록



녹슨 철계단을 밟고 옥상에 오른다 일행을 놓친 듯 까만 새 한 마리 이리저리 뒤척이며 낯선 길을 헤맨다 방죽에 단단히 발이 묶인 폐비닐은 바람이 불어댈 적마다 꺼이꺼이 너의 이름을 부른다 자음이 떨어져나간 간판과 모음이 사라진 간판 중 어느 것이 더 오해를 불러일으킬까 가난한 내력마다 묵은 때가 내려앉았다 루핑을 얹은 지붕 아래에는 말 없는 청춘이 겨우 제 몸의 온기를 안고 누워 있을 것이다 벽돌을 싣고 질주하는 트럭의 꽁무니를 쫓아 번번이 먹구름 같은 흙먼지가 헛소문을 퍼뜨린다 앞이 흐리고 한결같지 못한 것이 사람의 일이다 이십일 세기 이전과 이후로 사랑의 방식조차 적잖이 달라졌다 등을 돌린 채 곁불 쬐는 잡부처럼 좁은 길가에 뿌리 내린 잡초들은 왜 질문을 잃었을까 중심에서 벗어난 것들은 울지 않는다 모두 잘도 태어나 애써 가꾸지 않아도 저절로 살아가는 내밀한 풍경이다 뉘엿뉘엿 해가 진다





*시인의 말


마음의 저수지에 정체불명이 산다.
밤낮 물에 젖어 눈빛을 반짝인다.


견딘다, 라는 말의 아름다움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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