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꽃 피는 시절에 - 김창균
개들이 빈 가방을 물고 와 반나절을 씹어대는 여름날
일렬종대나 횡대로 서서
고추대궁 흰 꽃들 피워 올린다.
어떤 이별은 맵고도 쌉쌀하게 와서는
부끄럽게 익어가고
항상 곁에 서 있었으나
한 번도 손잡아 본 적 없는 말들만
입안에 얼얼하게 남았다.
무수히 사랑했으나 공평하게 나눠 쓰지 못한 시절들이
저마다 다른 크기로 슬픔 같은 것을 맺어
더 맵기로 작정한 씨앗들 푸른 몸피 속에 드는데
늦게 나와 일찍 병드는 여린 고춧잎들을 떼어내며
또다시 내 편이 아니었던 한 시절을 건너며
꽃 피고 꽃 지는 그 질문에 답하지 못해
저 맵고 아린 꽃들의 초입을 한참 서성거렸다.
*시집, 마당에 징검돌을 놓다, 문학의전당
청양고추 - 김창균
저것은 응축된 눈물의 결정
저 맵디매운 속내로 한동안
내 믿음이 옮겨갔던 것인데
당신의 몸 쪽으로 귀를 옮겨갔던 것인데
당신과 마주 앉아 찬물에 밥 말아 먹던 시절
세월은 독하게 이별 쪽에 닿고
서로 사랑을 베어 먹으며
고통에 중독되던 시절도 있었지
지금은 상강(霜降) 무렵
입안이 얼얼하게 바람이 들어차고
자주 당신을 생각할 때마다
가혹하게 보충되는 눈물, 눈물들
# 시를 읽다 어릴 적 추억을 되새김한다. 우물에서 떠온 시원한 물 한 바가지를 들이키고 점심 밥상에 앉는다. 열무김치와 된장에 풋고추, 그리고 물에 만 꽁보리밥이다. 나는 안 매운 고추를 어머닌 매운 고추를 고른다. 순전히 눈 짐작이다. 잘못 고르면 입안이 얼얼해서 연신 찬물을 들이켜야 한다. 늦가을이면 고춧대도 서서히 야위어간다. 그때 어머닌 고춧잎을 따서 (훑어서) 데친 후 된장에 묻혀 밥상에 올렸다. 그때 먹던 고춧잎 나물맛이 지금도 아련하다. 고춧잎 향기처럼 쌉싸름한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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