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혼자서의 낭독회 - 박세미

마루안 2019. 7. 29. 22:26



혼자서의 낭독회 - 박세미


커튼은 고백하기 좋다
눈썹과 코끝을 스치며, 커튼은 자꾸만 바닥으로 늘어지고
등에는 투명한 창이 매달려 있지
술래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커튼을 빌려 나타나는 입술의 형상
목소리는 입술의 모양보다 늦게 온다


그러니까 혼자는, 후회를 기다려


베란다 쪽에서 내려다보면 화단,
복도 쪽에서 내려다보면 아스팔트 바닥이네


그러니까 혼자는, 죽기 좋은 곳을 확인해


난간은 고백하기 좋다
햇빛을 반사시키며,
옥상은 혼자를 튕겨내고 싶어하지
목소리는 공중에 내민 발보다 늦게 온다


낭독을 마치고 나면,
반가운 택배를 기다리고
우리는 친구처럼 둘러앉아 커피를 마시기도 해


그러니까 모두는, 혼자가 되어서야
낭독을 한다



*시집, 내가 나일 확률, 문학동네








뜻밖의 먼 - 박세미



거울을 깬 적이 있지
누군가 불길한 징조라고 말해주었고
그날 이후 나는 그릇도 깨고 화병도 깨고
날카롭게 조각난 것들을 주우며
우연이라고 믿으며

긴 장마가 끝났어
숲의 입구에서 나는 나의 발을 한 번 보았지
사람들이 가지 않는 길로만 가자
깊고 연약해 보이는 땅만 밟자
진흙 속으로 오른발이 쑥 빠질 때
내버려두자
더 깊이 빠뜨리며
기다리자
머리 위로 새똥이 떨어질 때까지
멀리서 거울을 깨뜨리는 소리가 들려올 때까지
무릎까지 차오른 진흙이
온몸을 뒤덮을 때까지

내게 가장 재수없는 일은
당신이 내 이름을 계속 부르는 것일까
당신이 내 이름을 한 번도 부르지 않는 것일까






# 박세미 시인은 201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건축역사, 이론, 비평을 전공했다. 짧지만 의미심장한 시인의 말이 긴 여운을 남긴다.


나와 나 사이에 흐르는 의심의 강이 있고
건너갈 수 있는 날과
건너갈 수 없는 날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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