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응달의 눈 - 박미란

마루안 2019. 7. 28. 18:50



응달의 눈 - 박미란



반쯤의 잘못이 서로에게 있다면
차라리 인사하고 가자


그것도 안 되면
온종일
그 집 앞을 왔다 갔다 해보자


서둘러 나간 입술엔 온기가 남아 있지 않아


바람에게서 털옷을 떼어내려면
마른 가지에 앉았던 새의 발가락을 더듬어보자
새를 떠나보낸 검은 숲의 적막을 기억해보자


질척이는 골목으로 접어드는데
집들은 문을 걸어 잠그고


응달의 눈을 바라보는 사람은
반쯤의 잘못으로 헤어진 사람


가벼운 것들이 쌓이면
얼마나 깊어지는지 아는 사람


무얼 보내줄 수 없어


가야 할 곳도 지우고 이곳에 남으려 하는지



*시집, 누가 입을 데리고 갔다, 문학과지성








머루 - 박미란



가령, 손가락 사이 눈송이라든지
진흙 속에 살며 진흙을 앚은 한때라든지


기를 쓰고 젖을 빨다가 빤히 쳐다보는
아기의 물기 어린 눈빛이라든지


붙잡지 못하고 보내줬던 기억은
누구에게나 있었다


사람에겐 정을 내지 않는 그는
모임 때마다 뼈다귀를 담았는데


그날은 미안했던지
쪼르르 쫓아오는 강아지 눈망울이 하도 예뻐 머루라 부른다고
묻지도 않은 말을 남기며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일어났다


그의 뒷모습을 훔쳐보다가
눈이 마주쳤다


머루는 얼마나 홀로였으면 저렇게 새까매졌을까


마주치지 말았어야 했다
커다란 덩치의 그가 본 적 없는 머루와 닮은 것 같다





*시인의 말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한 줄기 빛이 마음에서 입술로
건너가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뒤를 돌아보면
너는 보일 듯 보이지 않고


참, 시시하기도 하지
이 모든 뒤척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