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비켜선 것들에 대한 예의 - 류시화

마루안 2019. 7. 28. 18:21



비켜선 것들에 대한 예의 - 류시화



나에게 부족한 것은 비켜선 것들에 대한 예의였다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을 때
한쪽으로 비켜서 있는 이들
봄의 앞다툼 속
먼발치에 피어 있는 무명초
하루나 이틀 나타났다 사라지는 덩굴별꽃
중심에 있는 것들을 위해서는 많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비켜선 것들을 위해서는 눈물 흘리지 않았다
산 자들의 행렬에 뒤로 물러선 혼들
까만 씨앗 몇 개 손에 쥔 채 저만치 떨어져 핀 산나리처럼
마음 한켠에 비켜서 있는 이들
곁눈질로라도 바라보아야 할 것은
비켜선 무늬들의 아름다움이었는데
일등성 별들 저 멀리 눈물겹게 반짝이고 있는 삼등성 별들이었는데
절벽 끝 홀로 핀 섬쑥부쟁이처럼
조금은 세상으로부터 물러나야 저녁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을
아, 나는 알지 못했다
나의 증명을 위해
수많은 비켜선 존재들이 필요했다는 것을
언젠가 그들과 자리바꿈할 날이 오리라는 것을
한쪽으로 비켜서기 위해서도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비켜선 세월만큼이나
많은 것들이 내 생을 비켜 갔다
나에게 부족한 것은
비켜선 것들에 대한 예의였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잠깐 빛났다
모습을 감추는 것들에 대한 예의



*시선집,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열림원








꽃 피었던 자리 어디였나 더듬어 본다 - 류시화



꽃을 꺾자 꽃나무의 뿌리가 어두워진다
꽃나무는 얼른 다른 꽃을 밀어 올린다
스스로 환해지기 위해
내 오른쪽 늑골 아래
환하게 밀어 올려지지 못한 꽃들이
수복하다
누가 저곳에 저리도 많은 꽃 버렸을까
이제는 그리워하지 않아도 될 것들 너무 많아져
마음 걸 곳 찾을 일 참으로 없어
오래되었구나
어느 생에선가 마음 한 번 베인 후로
꽃의 안부 묻지 않은 것이
늑골의 통증이 그냥 통증이 아니었지만
오늘 밤 꽃이 바람에 스치는 것
꽃 지는 의미 알라는 것 아니겠는가
꽃 피었던 자리 어디였나 더듬어 보라는 것






# 둘 다 류시화 세 번째 시집인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에 실린 시다. 나중 시인이 낸 3권의 시집에서 발췌해 묶은 시선집에도 실렸다. 그만큼 류시화의 대표작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 에전에 놓쳤던 시가 눈에 들어오는 경우가 있다. 이 시들도 그렇다. 지나쳤던 시가 숙성되어 다시 가슴을 촉촉하게 적신다. 비 내리는 날이라 더욱 그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