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장롱 속에는 별을 놓친 골목길이 - 이설야

마루안 2019. 7. 27. 21:54



장롱 속에는 별을 놓친 골목길이 - 이설야



장롱 속에는 곰팡이 핀 옷들이 산다
내 거죽이 아니면서 거죽인 옷가지들 차곡차곡 넣으면
서랍이 된 나무가 금방이라도 둥치를 일으켜 가지를 뻗을 것만 같다


밤마다 곰팡이꽃은 내 옷을 입고 외출한다
덜컹거리는 마을버스를 타고, 열우물고개를 넘어
뭉게구름 사이를 지나, 별 위에 지도를 그리며 간다
곰팡이꽃을 퍼뜨리러 자박자박 길 위에다 또다른 길을 내며 간다


장롱 속에는 벌레들이 산다
옛 애인의 입술이 지나간 원피스를 핥으며
우두둑우두둑 빗방울 내리치는 가슴을 갉아 먹으며 벌레들이 숨어 산다
기억의 서랍마다 알이 슬어 있다
새로 태어나는 시간을 죽이고, 물구나무서서 나뭇가지를 잃기도 한다
대패질에 깎여나간 거죽들을 갉아 먹으며 벌레들이 숨어 산다


장롱 속에는 밤늦도록 쏘다니다 별을 놓친 골목길이 들어와 있다
아직 못 가본 길들과 잘못 걸었던 길들이 구겨진 채
뒤틀린 종아리, 접힌 어깨가 가슴에 묻은 핏자국을 안고 있다
처박아놓은 양말로는 발목이 삐는 길을 마저 갈 것이다


언젠가 나처럼 폭삭 주저앉으면
장롱에 새겨진 새떼와 구름도 모두 날아가고
삭고 삭아 텅텅 비어갈 것이다



*시집, 우리는 좀더 어두워지기로 했네, 창비








귓속에 쥐가 - 이설야



남경 야시장 앞,
깨진 보도블록 위에 쥐 한마리
모로 누워 잠을 자듯 죽어간다


아버진 쥐색 양말을 좋아했다
늦은 아침 구멍 난 양말을 신고
동인천 시계탑 분침을 쫓아다니다가
해가 넘어지면 쥐의 소굴로 귀가했다
검은 숯으로 제 가슴만 문지르던 사람들은
돌멩이를 쥐고도 세상을 향해 던지지 못했다
제 발등만 세차게 내려쳤다


고양이도 잠들면서 꿈을 바꾸는 시간
쥐는 거리의 모든 소란을 빨아들이고
와불로 누워 있다
홀로 누운 고요의 털 위로
뭇별들이 조문 중이다


아버지 죽고, 어느 밤은
집에 생쥐가 들어와 끈끈이를 놓았다
발바닥이 달라붙어 애원하는, 쥐의
처량한 눈빛 위에
빨간 대야를 씌워버렸다


그런데
자꾸만 내 귓속을 들락거리는
아버지 울음소리
쥐 오줌같이 축축하던,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응달의 눈 - 박미란  (0) 2019.07.28
비켜선 것들에 대한 예의 - 류시화  (0) 2019.07.28
꽃의 광인 - 주영중  (0) 2019.07.27
여자의 허기는 우주다 - 손현숙  (0) 2019.07.26
간에 기별하다 - 김연종  (0) 2019.07.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