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여자의 허기는 우주다 - 손현숙

마루안 2019. 7. 26. 23:02



여자의 허기는 우주다 - 손현숙



허공으로 두 발 내디뎌야 할 것만 같은 이 시간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땅거미 질 무렵, 그리고 잠자리에 들 때... 뭘까, 문득 한꺼번에 모든 것을 빼앗겨 버리는 듯
한 순간,
두렵다
내 뱃속에서 그 무엇이 빠져나간 듯한 허기!
나는 배를 땅바닥에다 대고 밀면서
진흙이라도 한 줌 긁어먹고 싶어진다


자궁! 나는 이것을 비밀이라 부른다


여자는 그 속에 아기를 품고서 열 달을 견디기도 한다
그것은 쉽게 열어 보일 수도, 함부로 꺼내 가질 수도 없는, 자기 자신도 해독 불가능한 신의 영역!
거기서 여자는 생명을 낳는다
그러니까 여자는 또 다른 우주 하나를 내장하고 위태롭게 세상을  건너가야 하는 거다
세상에 태어날 때 이미 여자와 남자는 전혀 다른 종족인 것
그러니 남자여, 여자를 안다고 말하지 마라
그것은 아마도 걸어서 달까지 가는 일,
나의 허한 '여성'에 대하여 함부로 말하지 마라



*손현숙 시집, 손, 문학세계사








열 번은 너무해 - 손현숙



피자를 배달시켰는데 쿠폰이 하나 따라왔다
자장면 한 그릇에도 스티커는 한 장이다
미장원에서도 보리밥 뷔페에서도 심지어 노래방에서도
열 번에 한 번은 거저다


상술은 또 나를 은근히 꼬드긴다
"그거, 금방이에요"
내가 생각해도 그까짓 거 싶었다
어떤 날은 공짜에 홀려서
점심은 자장면 저녁은 피자를 먹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고지다
산을 오르다가도 팔부 능선에서 고꾸라지듯
다 모은 쿠폰 감쪽같이 사라지기도 하고
유통기한이 살짝 넘어가기도 했다
무엇보다 자주 먹는 맛은 물렸다


도장 찍듯 뻔질나게 찾아오고 문자하고 전화하고 메일하고
안달하며 질주하던 그에게서
소식이 뚝, 끊겼다
그가 나를 잃어버렸다
어찌 된 일인지 깜깜 등을 보인 그에게
나는 나를 더 이상 내놓을 것 없겠다





*시인의 말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저지르고, 저지르고, 저지르면서
나를 해치면서
실컷 살면서
여자의 허기,
그 몸 속에 우주를 품었다.
그렇게 한 시절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