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아름다운 거래 - 김석일

마루안 2019. 7. 23. 23:28

 

 

아름다운 거래 - 김석일

 

 

배 아파 낳아준 엄마도 아니다, 그렇다고

속 태우며 키워준 어미도 아니다, 다만

홀로 되어 겉돌기만 하던 적적한 아버지를

혼인신고도 않은 채 바라는 것 없이

알뜰히 보살피고 위로하다 곱게 보내주신

아버지보다 많이 젊은 새어머니다

 

고마움에 두 분 사시던 작은 아파트

당신 이름으로 해드리고, 적지만

평생 자식 노릇하리라 생활비도 드린다

 

가끔 밑반찬을 해다 드리던 아내가

눈이 퉁퉁 붓도록 울며 돌아왔다

 

새어머니가 니들이 사준 아파트니까

니들이 다시 가지고 가라 하신단다

조카 녀석이 아파트에 관심을 갖는다고

나 죽으면 괜히 이상한 꼴 생길 수 있다고

 

대신 죽는 날까지 이 집에 살게 해주고

죽으면 아버지와의 모든 흔적 수습해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 묻어 달라고·····

 

젊은 시절 새어머니를 나는 누나라 불렀다

새어머니는 아버지를 사장님이라 불렀었다

 

 

*시집, 연화장 손님들, 북인

 

 

 

 

 

 

봄비 - 김석일

 

 

오랜 기다림 끝에 내리는

조마조마한 봄비를 바라보다, 문득

 

옛날 반백 년도 더 된 아주 먼 그 옛날 사랑방 두짝문을 활짝 열어놓고 곰방대를 지그시 문채 들녘을 바라보던 할아버지의 봄비엔 거친 대지를 뚫고 올라오던 연둣빛 생명의 위대함이 보였을 테고, 대청마루에서 다듬이질을 멈추고 앞마당에 튕기는 빗방울을 망연히 바라보던 어머니의 봄비엔 무심한 세월의 덧없는 서운함과 연분홍 진달래 만발한 옛 동산이 보였을 터라고 생각해 보는데·····

 

지금 내 앞에서 흩날리는 빗줄기들은

자꾸만 흐릿해지는 추억의 조각들인 양

울컥, 그리움이 지린 서러움처럼

술 고픈 가슴앓이 조짐을 안고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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