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장마, 떠도는, 지워지지 않는 - 고찬규

마루안 2019. 7. 26. 22:10



장마, 떠도는, 지워지지 않는 - 고찬규



여름보다 긴 장마다
반지하는 반쯤 더
땅 속으로 가라앉는다
퍼내지 못한 그리움, 가슴 가득
고여오는 빗물 목구멍까지 차오른다
지직지직 라디오는 귓바퀴처럼
구겨질 대로 구겨진 세상 이야기
잘빠진 음악을 귓속에 밀어넣는다
보는 데 익숙한 눈은
잡음 선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선풍기를 창 쪽으로 돌리고
몸을 길게 늘여 세상을 엿듣는
담배 연기를 토막토막 자른다
느낄 수 있다 분명 누군가
전파를 방해하고 있다
외침 소리, 군화 소리, 신음
소리 소리가 시대를 거슬러 질주하고
큰 물줄기를 따라 재편되는 세상
무엇도 바다에 닿지 못한다
붉을 꽃잎 떠다니고 서슬 퍼런
잠기지 않은 것들은 불안한 오후
장마보다 긴 빗줄기다



*시집, 숲을 떠메고 간 새들의 푸른 어깨, 문학동네








야간열차 - 고찬규



이미 오래되어 늘어져버린
젖가슴과 예매된 차표 같은 저마다의
깔깔한 무덤을 생각한다 풀처럼
흔들리며 바람에 의자하여 살았다고
말한다 부끄럽게도 부러짐이란
생각지도 못했다 삶 안에서


언제부터인가 더이상, 삶은
계란을 필요로 하지 않았고
부화에 실패한 인생은 부활을
믿지 않는다고 중얼거렸다 무표정으로
가끔은 한 줄의 김밥에 목이 메기도 하였다


부드럽게 풀리는 담배 연기에
기침 소리가 거칠게 얽힌다 숨을 멎고
왜 천사는 아기가 아니면 처녀일까
생각하다 그만두기로 한다 그저
아름다운 시절이 있었음을 떠올린다 누구나


오랫동안 날 것들은 날지
못했다 익숙하게 이어폰을 꽂고
창틀에 기댄다 부화에 실패한 인생도
날개 꺾인 아픔도 애써 추억하지 않는다
오래된 필름 같은 흑백 풍경 속


그나마 흙 파먹던 시절을 한 삽 떠올리며
기생충처럼 창가로 고개를 들이밀면
살아 있다는 갈증을 느끼며
가까이 가까이 좀더 크게 다가오는
말라붙은 가슴


할머니의 보퉁이가 쓸쓸해 보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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