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고래의 밤 - 이용한

마루안 2019. 7. 23. 22:15



고래의 밤 - 이용한



고래의 밤은 깊고 사내는 심해에 잠겨 있다
어떤 신음은 액체처럼 눈 속에 고인다
고래에겐 바다보다 지느러미로 끌고 온 바닥이 더 아프다
등시 시린 저녁을 눈꺼풀로 가만 덮고 있는
고래의 귓가에
사내는 슬프고 오래 말간 숨을 밀어넣는다
바다를 건너온 비릿한 소리가 혀끝에 와닿는다
아, 하고 벌린 입에서
안간힘으로 집어삼킨 포구의 날들과
질긴 골목이 꾸역꾸역 흘러나온다
내게도 고래 심줄 같은 악연이 있었다고,
사는 게 끝 간 데 없는 벼랑이었다고,
눈 한번 질끈 감으면 끝낼 수도 있었다고
고래는 조용히 돌아앉아 어깨를 들썩인다
등이 굽은 사내는 하염없이 천장만 보다가
고래등만한 배후에서
무너진 억장이나 쓰다듬다가
꿰맨 자국이 역력한 원피스 지퍼를 내리고
다 젖은 거죽에 시든 가슴을 포갠다
쓸쓸함이야 쌓이면 얼마나 쌓이겠냐고
바다면 어떻고 바닥이면 또 어떠냐고
밀물지는 고통과 썰물지는 세월이 만났으니
꽃처럼 흩어지고 물처럼 철썩거리며
우리 그렇게 밀려나서 살자고
사내의 언 손이 고래의 신음을 끌어안는다
반쯤 깨진 허공의 퀭한 달이나 보면서
고래는 들썩이고 아침까지 사내는 뒤척이는 것이다.



*시집, 낮에는 낮잠 밤에는 산책, 문학동네








로드킬 - 이용한



그냥 길이 되는 거다
고양이처럼 고양이처럼
죽으면 납작해지는 거다
그 납작함이 만화에서처럼 부풀어오르진 않을 거다
어떤 나뭇잎은 나를 흔들어보겠지
일어나세요, 길바닥에서 이렇게 납작하게 주무시면 안 돼요
죽은 뒤에도 안 되는 게 있을 거다
말랑한 것들은 구멍에서 흘러나와 딱딱하게 굳어가겠지
피우지 못한 담배 생각이 간절하겠지
집에 두고 온 기억은 화분처럼 말라 가겠지
죽으면 그만인 거다
고양이처럼 야옹소리도 없이 가는 거다
입술은 문득 구름을 중얼거리겠지
걱정은 뒤에서 오겠지
오지 않아도 상관없겠지
가지 못한 속도가 무게를 앞지르겠지
공기의 끝은 향기롭겠지
고양이처럼 고양이처럼 새근새근 잠드는 거다
뒤늦게 빨간불이 켜지겠지
정거장의 봄날은 환장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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