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어느 범신론자의 고백 - 나호열

마루안 2019. 7. 22. 19:57



어느 범신론자의 고백 - 나호열



고해소마다 사람들이 시끌벅적하다
그들은 번호표를 받고 차례를 기다리다가
얌전히 불려나간다
은행에서는 돈 없음이 증명되고
병원에서는 아픈 것이 죄가 된다
솔직하게 불지 않으면 도와드릴 수 없습니다
도저히 건너갈 수 없는 저 편에서 묻는 질문에
양심은 콩알만해진다
일주일에 몇 번 하십니까
얼굴이 벌겋게 닳아오른 저 사람은 변비 환자이다
비밀은 없습니다 소화되지 않는 불안과 함께
신은 어디 계신 것일까
낮은 곳에서 사람들은 서로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혹시?
씨씨티브이가 어디론가 나를 낱낱이 전송하고 있다
숨기려고 고개를 숙일수록 혐의는 늘어날 것이다
분명 신은 어딘가에 있다



*시집, 타인의 슬픔, 연인M&B








강물에 대한 예의 - 나호열



아무도 저 문장을 바꾸거나 되돌릴 수는 없다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에서 끝나는 이야기인지
옮겨 적을 수도 없는 비의를 굳이 알아서 무엇하리
한 어둠이 다른 어둠에 손을 얹듯이
어느 쪽을 열어도 깊이 묻혀버리는
이 미끌거리는 영혼을 위하여 다만 신발을 벗을 뿐
추억을 버릴 때도
그리움을 씻어낼 때도 여기 서 있었으나
한 번도 그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구나
팽팽하게 잡아당긴 물살이 잠시 풀릴 때
언뜻언뜻 비치는 눈물이 고요하다


강물에 돌을 던지지 말 것
그 속의 어느 영혼이 아파할지 모르므로
성급하게 건너가려고 발을 담그지 말 것
우리는 이미 흘러가기 위하여 태어난 것이 아니었던가


완성되는 순간 허물어져 버리는
완벽한 죽음이 강물로 현현되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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