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그 이름 안티고네 - 유종호

마루안 2019. 7. 22. 19:16

 

 

 

한국 문단에는 이름이 헷갈리는 평론가 두 사람이 있다. 유종호와 유성호다. 세상엔 동명이인도 부지기수지만 비슷한 이름이 하필 좁은 평론계여서 더욱 그렇다. 이 책도 저자가 헷갈렸다. 그렇다고 게으른 내가 두 사람의 책을 많이 읽은 것도 아니다.

이 책은 팔순을 훨씬 넘긴 유종호 선생의 산문집이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시론집에 이어 연달아 읽었다. 어떤 책으로 후기를 남길까 하다 그래도 이 책이 조금 더 인상적이다. 80년 넘는 한 사람의 인생이 딱 초가을의 맨드라미 빛깔이다.

누구의 인생인들 곡절이 없겠느냐만 그런대로 겸손하게 나이 먹은 한 지식인의 아름다운 인생이 담겨 있다. 한편으로 이런 책을 읽으면 나는 공연한 트집을 잡고 싶다. 문맹율이 90%에 가까웠던 당시에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행운을 잘 모른다는 것,,

만약 부모 잘못 만나 아니 당시의 평균적인 가정처럼 초등학교 졸업하고 생업에 뛰어 들었다면 이런 책을 남길 수 있었을까. 광주 KBS에서 제작한 <남도 지오그래피, 이 부부가 사는 법>이라는 프로가 있다. 나도 몰랐으나 술자리에서 어느 친구가 말해줘서 알게 되었다.

유튜브에서 찾아본 20분 남짓한 그 프로에는 평생 시골에서 땅을 파서 농사를 짓고 자식들을 키운 농투성이의 인생이 담겨 있다. 묘한 중독성이 있는 이 프로는 잘 못 알아듣기도 하는 구수한 남도 사투리에 담긴 민초들의 인생 이야기다. 제대로 교육 받지 못해 지식은 해박하지 못해도 정직하게 땅을 일구며 자연과 함께 산 그들의 일생이야말로 참 인생이다.

대부분 80 넘은 노인들이라 움직임 둔하고 표현은 어눌하지만 모두가 시인이고 사상가다. 나는 그들에 비하면 얼마나 행운아인가. 문맹을 면한 탓에 난해한 문장도 그런대로 읽을 수 있고 아직 책을 읽을 수 있는 시력도 갖고 있으니 대단한 복이다.

이 책에도 평생 글 농사를 지은 활자 노동자의 삶이 담겨 있다. 쓸데 없는 객기 부리지 않고 여기저기 기웃거림 없이 남과 비교하지도 않고 오직 자기 길을 걸었던 한 소박한 지식인의 삶이 온전히 담겼다. 엘리트주의나 꼰대 냄새를 많이 풍기지도 않는다.

이 책에 나온 아주 공감이 가는 구절이 있다. <이른바 노년의 지혜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세상 풍파나 삶의 곡절을 많이 겪었다고 해서 각별한 지혜가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어려움에 대한 면역력이 조금 생겨난다는 정도가 아닌가 생각한다. 노년이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삶의 쇠퇴기다. 그런 시기에 각별한 지혜가 생겨날 리 없다. 만약 고령자가 지혜라고 할 만한 것을 소장하고 있다면 노년 이전에 터득해서 손실 없이 비축해둔 것이리라>. 이 구절을 읽고 나는 독서 후기를 쓰기로 결정했다.

아름다운 문체나 밑줄을 긋고 싶은 기막힌 구절은 없으나 삶의 진정성이 느껴지는 담백한 문장에서 소박하게 늙은 지식인의 전형을 본다. 이렇게 나이 먹은 것도 복이다. 유종호 선생은 80 중반에 들어선 노년에도 여전히 호기심이 왕성하다. 건강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본 받을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