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달과 무 - 박서영

마루안 2019. 7. 20. 22:03



달과 무 - 박서영



우리는 당신에게 영혼을 보여준 날부터
싸우기 시작했지
달에 간판을 달겠다고 떠나버린 사내와 나는
벚꽃나무에 간판을 달다가 떨어진 적이 있고


침묵하는 입술은 나를 취하게 하네
난 꽃도 아니다, 이젠 무언가를 말해 주기를
지나버린 시간에 석유를 끼얹고
불을 지르고 싶어지는구나
기억을 덮는 뚜껑으로 사용하기엔
달은 너무 아름답게 빛나네, 달은 말랑거리는 느낌
시간을 열었다가 닫는다


지구의 밥집들은 왜 자꾸 없어지고 있나
함께 먹은 가정식 백반
노랗게 찌그러진 양은냄비 속의 비빔밥


개업을 하고 나면 폐업을 향해 움직이듯이
마음을 열면 전 생애가 부서지고 사라져버린다
무엇을 생포하고 무엇을 풀어줄까
난 나비도 아니다, 어쩌면 스스로에게 사로잡힌 채
징징 울다가 날아오르는 꽃송이일지도 모르지
침묵 다음에 싸움, 영혼을 보여준 날의 싸움,
우리는 영혼을 보여준 날부터 싸우기 시작했지
달과 별은 나를 취하게 하네
당신은 하늘에 달아놓은 간판 불을 켜지만
이별 후엔 함께 먹은 밥집들도 문을 닫아버려
나는 손을 뻗어 달의 간판을 꺼버리겠네
비밀식당들의 폐업 소식을 알리겠네



*시집, 착한 사람이 된다는 건 무섭다, 걷는사람








능소화 - 박서영



옆구리를 타고 올라가던 능소화가
눈동자를 뚫고 나왔다 마른 가지를 내밀었다
돌의 박물관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다
진안 마이산에서 본 돌덩이를 파고 들어간 바로 그 능소화
모든 것이 조용히 지나가주지 않는 날들이다
칠월에 꽃피는 거 보러 가겠다고 엉덩이를 털며 돌아와
깜박 잊고 살았다 한 해가 지나버렸다
칠월에 능소화가 피었다가 졌겠지 아마, 그날 두고 온
으깨진 시간들이 내 몸에 남아 있었나 보네
잠을 잤다 옆구리를 타고 올라가던 능소화가
방향을 바꾸는 게 느껴졌다
눈알이 빨개졌다 독을 먹은 꽃이었고 울음이었다
습(濕)의 시절이 다시 돌아온 걸까
마디마디 매마르지 않고 잎들도 꽃들도 무성하라고
눈물이 흐른다 흘러준다
내가 비를 좋아한다는 걸 당신이 잊지 않기를






시인의 말


동물원 문을 닫을 시간이야.
흩어지는 모래밭에 두 발을 묻은 토끼가
갑자기 일어서서 노을을 바라보며 두 손을 모은다.
두 손을 맞잡은 토끼의 모습이
헤어진 인연을 끌어당기듯 따스하고 뭉클하다.
저렇게 작은 짐승이, 저렇게 작은 손으로
저물어가는 해를 바라보며


우정과 사랑을 지키게 해 주십시오.


아, 저렇게 희미한 소리로 우는 토끼가
신(神)의 침묵을 경청하고 있는 토끼가


낮은 울타리를 넘어
수천 번은 도망갈 수 있었을 텐데 말이야
좁디좁은 모래땅을 떠난 적 없이
멀고도 높은 꿈의 슬픔에 몰입하고 있다.


밤하늘 살별이 긴 꼬리를 깜박이며
모습을 감출 때까지
달이 나와서 사라질 때까지
토끼 한 마리가 두 손을 모으고 있다.
야간개장의 사랑
나도 잠들기 전 기도하는 버릇이 있어
회고록을 지어내기 위해 그림자를 늘어뜨린 토끼처럼
쏟아지는 외로움에 눈이 빨개지면서
나와 함께 흘러가 줄 토끼를 찾고 있어.
우는 짐승과 기도하는 짐승에게서 사랑의 기척을 느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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