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通

창작과 비평 2019년 여름호 시인 탐색

마루안 2019. 6. 1. 22:03

 

 

 

새로 나온 시집을 처음 접할 때처럼 금방 나온 따끈한 문예지를 들출 때도 마음이 설렌다. 이걸 어떻게 표현을 해야 하나. 맛난 음식 앞에서 군침이 도는 것처럼 책에서 나는 잉크 냄새 또한 내게는 식욕처럼 무언가를 전달하는 에너지원이다.

이번엔 어떤 시가 실렸을 거나. 문학과 사회와 함께 창비는 늘 나를 설레게 하는 잡지다. 다른 세련된 문예지들이 쏟아져 나오지만 첫사랑에 대한 아련한 추억처럼 두 잡지는 내 청춘의 추억 속에 담긴 문예지다.

애지중지 모았던 그 많은 과월호를 모두 떠나 보냈지만 나름 치열했던 시절은 여전히 그 잡지들과 함께 가슴에 남아 있다. 이번 호에는 두 시인이 눈에 들어온다. 누구의 시를 올릴까 하다 그냥 두 사람 다 올리기로 한다. 두 편씩 시를 발표했으니 네 편이다. 전부 올리자니 너무 많아 고민이다.

지나가면 잊혀지고, 시집 나올 때까지 기다리지 못해 한 편씩만 올린다. 이것이 바로 행복한 고민인가. 이런 고민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시란 모름지기 반복해서 읽고 싶을 정도의 울림이 있어야 하는 것, 시를 음미하며 또박또박 한 자씩 옮기는 마음이 즐겁다.

 


외로운 사람은 외롭게 하는 사람이다 - 이현승


마치 백년 전에도 태극기를 흔들었던 것처럼
오늘 거리에는 노인들이 많다.
개항과 자주가 붙었다 떨어졌다 했던 백년 전처럼
태극기 옆에는 유대의 깃발들이 보이고
박근혜 석방, 문재인 OUT을 앞뒤로 새긴 피켓을 향해
박근혜 X X X ! 인도 쪽에서 누가 쏘아붙이자
노인의 눈에서 다시 화염이 일었다.

백두산은 휴화산이 아니라 활화산이었다.
천년 전에 한반도를 1미터 두께로 뒤덮었던 화산재조차
어떤 풍요의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죽은 풍뎅이를 잘라 나르는 개미떼를 보듯
자연의 편에선 다 합리화가 가능하고
잘못된 선택과 행동조차 교훈을 남긴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허기보다 착찹한 진실로 남는다.

지난 백년 동안
제국주의와 맞서고 민주주의를 위해서 싸웠지만
싸우며 가난과 무지를 건너왔지만
마침내 맛집 앞에 줄 선 사람들처럼
우리를 무너뜨린 것은 외로움이었다.
외로워서 먹고 화가 나서 더 먹어치웠지만
먹어서 배가 부르고 살 만해지면
주려 욕이 비어져 나오는 맞은편 사람도 보인다.

보인다는 게 이렇게 안심이 된다.
무너진 사람은 아무것도 안 보이니까.
거리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댄 그 사람도
뭘 봐? 화난 사람 첨 봐? 한번 더 소리쳤지만
화난 사람이 화내면서 더 화나듯이
우리는 부끄러워서 울고 울면서 부끄럽다.
아무리 그래도 뭘 먹으면서도 화내는 사람을  보면
아직 겨울 외투를 입고 있는 봄처럼
마음이 춥고 외롭다.



*이현승
1973년 전남 광양 출생. 2002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시집 <아이스크림과 늑대> <친애하는 사물들> <생활이라는 생각> 등

 

 



시계 - 백무산


저건 가기만 한다
오는 것은 알 수 없고
가는 것만 보이는 건
그건 분명 이상한 일이지만
숙명인 양 가는 뒷모습만 전부다

도무지 얼굴을 볼 수가 없다
우리는 열차의 맨 뒤 칸에서 뒤를 보고 있다
마치 기계노동의 습관처럼
도무지 누가 앞에서 운전을 하는지 알지 못한 채
얼굴이 있는지도 모른 채 우린
모든 걸 배웅하기에 바쁘다

가는 것은 어디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몸의 부피에 가득 찬 실타래가
빠져나가는 것이라는 생각에 미칠 뿐이다
그건 마치 그림자를 어둠이라고 생각하는 것
태양을 가리기만 하면 밤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저 시계는 뒷모습만 비추는 거울이다

우리는 맞이하지 않고 보내기만 한다
사냥을 떠나지도 않고 주문을 외우지도 않고
몸에 피를 바르지도 흙을 밟지도 않는다
메시아를 기다리지도
내세를 기다리지도 않는다
존재를 헌신하지도 않는다

순환의 절반을 버림으로써 얻은
이 엄청난 질주와 쾌락
우리는 어떤 재생에도 참여하지 않는다
숙명을 발견하지도 않고 발명했을 뿐이다
숙명이라는 쏟아지는 별들의 시간을



*백무산
1955년 경북 영천 출생, 1984년 <민중시>로 등단. 시집 <만국의 노동자여> <동트는 미포만의 새벽을 열고> <인간의 시간> <길은 광야의 것이다> <초심> <길 밖의 길> <거대한 일상> <그 모든 가장자리> <폐허를 인양하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