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通

정인진 칼럼 - 사법연수원 동기 노무현, 그립다

마루안 2019. 5. 27. 19:57

 

# 경향신문에서 정인진 변호사의 칼럼을 읽었다. 검사, 판사, 변호사 등 법조인이라면 일단 부정적인 생각이 앞서는데 판사 출신의 이 양반 글에는 사람 냄새가 난다. 가슴 시린 문장에서 진정성이 느껴진다.

 

 

사법연수원 동기 노무현, 그립다


내가 고 노무현 대통령을 처음 만난 것은 1975년 가을 사법연수원에서였다. 7기생 전원 58명이 교실 하나에 모여 앉아 2년을 보냈으니, 나도 그를 조금은 안다고 할 만하다. 동기생 중 유일한 고졸 학력이고, 늘 웃는 얼굴의 촌사람풍이었다. 경상도 사투리 억양이 거셌다.

 

맨 처음 기억나는 일은 연수원에서 소풍을 갔을 때였다. 연수생들이 나와서 각종 장사치 흉내를 내는데, 뱀장수, 속옷장수 다음에 그가 나와서 면도날장수 흉내를 냈다. “그럼 이 돈을 다 받느냐?”라며 물건값을 이야기하는 대목에서 사람들이 예상한 다음 대사는 “아니에요. 절반 뚝 잘라서 단돈 천 원 한 장!”이었다.

 

그런데 그가 한 말은 “네, 다 받습니다. 받고요”였다. 모두들 포복절도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그가 마이크를 잡고 노래자랑 사회를 봤다. ‘무너진 사랑탑’이라는 노래를 한 곡조 하더니만, 돌아가며 노래를 시키는데 그는 “심리미진의 위법이 없어야 한다”고 법률용어를 써 가며 단 한 사람도 빼놓지 않았다.

 

연수원 수료 후 들은 그의 소식 중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그가 시위사건으로 구속될 뻔한 사건이었다. 당직판사가 영장 청구를 기각했더니, 당일에 재청구가 들어와 판사 세 명이 차례로 사건 처리를 회피했다는 것이었다. 몇 달 후 그는 다른 시위사건으로 구속되었다. 어려운 길 가는구나. 가슴이 저려 왔다.

 

그 해 그가 서울로 올라와 동기생 예닐곱 명이 모였는데 그 자리에 내가 끼었다. 그가 생각하는 운동이란 뭔지 물어 보았다. 어느 시골 할머니가 급환이 생겨 할아버지가 소달구지에 싣고 가다 마침 자가용 승용차가 지나가기에 세웠다. 동승자는 없고 개 한 마리가 타고 있었다.

 

읍내 병원까지 데려다 달라고 간청했더니 승용차 운전자가 할머니를 힐끗 보곤 그대로 가 버렸다. 이야기 끝에 그가 한 말은 이랬다. 사람이 개보다 못한 대접을 받아서야 되겠는가, 사람답게 사는 세상, 그런 세상을 만들려는 소망에서 운동을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와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 그가 인권변호사 노릇을 하던 시절, 법정에서 하도 집요하게 변론을 하여 판사들이 늘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한편 미안하고 한편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국회의원 선거에 나가서 자주 떨어지기에 딱하다고 생각했으나, 그뿐이었다. 누가 그를 욕하면 듣기 싫었지만, 칭찬해도 그저 그런가 싶었다. 그러다가 그가 대통령선거에 출마했다.

 

하루는 동기생 변호사가 판사실에 들어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뜬금없이 물었다. “야, 노무현이 빨갱이 아니냐? 그 사람 대통령 돼도 괜찮을까?”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빨갱이는 무슨…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도와줄 생각이나 하세요.”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어느 법조계 인사가 내게 이렇게 평했다. “진주민란, 동학농민운동, 3·1운동, 4·19혁명, 6·10민주항쟁, 광주항쟁이 모두 쌓여서 이제야 그 원이 이루어진 거다.” 대통령 취임식의 초청장이 왔는데, 하필 딸 졸업식 날과 겹쳤다. “아빠는 딸이 좋아, 대통령이 좋아?”라는 물음에, 영광의 날 그를 한번 볼 기회를 놓쳤다.

 

대통령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가 텔레비전에 나와 ‘전국 검사들과의 대화’를 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그의 앞날이 험난할 것임을 알았다.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소망이 그의 정치에서 과연 얼마나 구현될 것인가. 마음이 어두워졌다.

 

나와 가까운 이로 노무현 정부의 첫 내각에서 장관이 된 사람이 있어, 노 대통령이 어떻더냐고 물어 보았다. 그의 대답은 “사람 참 선질(善質)이더구먼”이었다. 본래 보수적 성향인 사람을 장관으로 데려가기에 좀 의아했고, 그도 노 대통령을 썩 긍정적으로 평할 것 같지는 않았는데 의외였다.

 

그는 대통령이 되고 몇 해 지나 동기생 부부들을 청와대에 초대했다. 이 다정한 남자는 한 사람 한 사람 악수를 하며 반갑게 인사를 나누다가, 판사 재직 중 작고한 동기생의 부인 앞에 서더니 “아…”라는 말만 되풀이하며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만찬 자리에서 몇몇이 마이크를 쥐고 덕담을 하는데 과거 부산에서 공안검사를 했던 이가 이런 일화를 소개했다. “하루는 노 변호사가 나를 찾아와서는, 운동권 학생 하나가 잡혀간 것 같으니 행방을 좀 알아봐 달라고 합디다.

 

그 학생의 어머니가 찾다 찾다 못 찾아 마지막으로 내게 와서 우는데, 사람 사는 세상에 어머니가 아들이 어디 있는지조차 몰라서야 되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학생이 어디 붙들려 있는지 알아내 노 변호사에게 일러주며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이 사람, 참 따듯하구나.

 

그가 검찰에 소환되었다. 검찰청사 앞에 닿은 버스에서 내려 먼 곳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을 뉴스 화면에서 보는 순간 섬뜩했다. 더 깊어진 눈매,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한 맑은 눈빛에서 왠지 불길한 느낌이 닥쳐왔다. 괜찮으려나.

 

마침내 운명의 날이 왔다. 무슨 멍울이 지는 것 같은 서러움에 잠겨, 나는 울었다. 그러다가 몇날 며칠 그의 죽음에 관한 기사가 난 모든 신문을 모았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어느덧 10주기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내가 오늘 할 수 있는 일은 겨우 이 글을 쓰는 것, 그리하여 이제껏 가슴에 담아두기만 했던 이 말을 전하는 것뿐이다. 이 시대에 우리는 다시는 당신 같은 사람을 만날 수 없을 것이다. 그립다.


*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