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바람의 묘비명 - 김중식

마루안 2019. 5. 23. 19:57



바람의 묘비명 - 김중식



<낙타 여인숙> 주인장은 코웃음 쳤다
여기서 태어났으니 사는 거지
딴 데 살다가 못 들어온다고,
사파리하면서 낙타 고기나 먹으라고,


사람 살 곳 아닌 데 사는 사람의 시조(始祖)는
금지된 사랑의 투석형(投石刑)이나
부족 청소의 학살을 피해
쫓아올 수 없는 곳으로
살아도 산 게 아닌 곳으로
도망친 사람일 듯


구름과 바람도 없이
그리하여 비도 없이
풀포기와 개미도 없이
머물 곳이 아닌 데서
또 다른 구약(舊約)의 족보를 썼을 듯


사는 게 별거더냐
다 똑같으므로 그냥 내버려두면 되는데
똑같지 않다면서 내버려두지 않을 뿐


지진 같은 치통과
이마에는 빗살 무늬,
살을 째는 각질을 달고 여기까지 왔는데


사막에 사람이 없는 게 아니라
사람 없는 곳이 사막인 거라서



*시집, 울지도 못했다, 문학과지성








다시 해바라기 - 김중식



이 세상만 아니라면 어디라도 가자,
해서 오아시스에서 만난 해바라기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르겠으나
딱 한 송이로
백만 송이의 정원에 맞서는 존재감
사막 전체를 후광(後光)으로 지닌 꽃


앞발로 수맥을 짚어가는 낙타처럼
죄 없이 태어난 생명에 대해 무한 책임을 지는
성모(聖母) 같다
검은 망사 쓴 얼굴 속에 속울음이 있다
너는 살아 있으시라
살아 있기 힘들면 다시 태어나시라


약속하기 어려우나
삶이 다 기적이므로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사막 끝까지 배웅하는 해바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