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와 나의 이야기 - 심재휘
오랫동안 비를 좋아했어요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비보다는 비가 오는 풍경을 좋아한다고 해야 맞아요
후드득 쏟아지는 비의 풍경 속에는
경청할 만한 빗소리가 있지요 그리고
비를 피해 서둘러 뛰어가는 사람들의 젖은 어깨
흙탕물을 간신히 피해 가는 짐차들의
덜컹거리는 불빛과
거리 아이들의 비가 새는 저녁
사실은
비에 젖지 않고도
비가 오는 풍경을 바라볼 수 있는 창가 자리가
더 마음에 드는 거지요
고백하자면 나는
창밖의 비보다는
창 안의 나를 더 좋아한다고 말해야 옳아요
*시집, 용서를 배울 만한 시간, 문학동네
따뜻한 한 그릇의 말 - 심재휘
머리의 부스럼을 긁듯 길 떠난 지 오래된 저녁에
처음인 거리의 식당에 앉아 중얼거린다
껍질이 벗겨진 말들을 뱉는다
목구멍에서 말이 분비되는 증상이 있더니
의사의 처방은 역류성식도염이었다
집을 떠나기 전이었다
식은 죽조차 먹지 못하고 한 달을 누워 있던 아버지
지난겨울 가시기 전에 마지막 장작으로 불 지펴
들릴 듯 말 듯한 밥 한 그릇을 지어주셨다
늦도록 외롭지 않게 살아라
그때에는 귀에 담지를 못하여 손에 움켜쥐지도 못하여
금세 식어버릴 것 같은 한마디 밥을
서둘러 꿀떡 삼켜버릴 수밖에 없었는데
집을 떠나 멀고 혼자인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그 말이
헐어버린 식도에 여태껏 걸려 있는지 중얼거리면
왜 그 말은 껍질도 없이 오래 아플까
아픈 무릎을 만져보는 오늘은 가슴 한가운데가
체한 것처럼 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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