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타의 생 - 류시화
사막에 길게 드리워진
내 그림자
등에 난 혹을 보고 나서야
내가 낙타라는 걸 알았다
눈썹 밑에 서걱이는 모래를 보고서야
사막을 건너고 있을 알았다
옹이처럼 변한 무릎을 만져 보고서야
무릎 기도 드릴 일이 많았음을 알았다
많은 날을 밤에도 눕지 못했음을 알았다
자꾸 넘어지는 다리를 보고서야
세상의 벼랑 중에
마음의 벼랑이 가장 아득하다는 걸 알았다
혹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을을 보고서야
무거운 생을 등에 지고
흔들리며 흔들리며
사막을 건너왔음을 알았다
*시집,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 문학의숲
내가 아는 그는 - 류시화
내가 아는 그는
가슴에 멍자국 같은 새 발자국 가득한 사람이어서
누구와 부딪혀도 저 혼자 피 흘리는 사람이어서
세상 속에 벽을 쌓는 사람이 아니라 일생을 벽에 문을 낸 사람이어서
물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파도를 마시는 사람이어서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밥 속의 별을 먹는 사람이어서
누구도 소유할 수 없는 지평선 같은 사람이어서
그 지평선에 뜬 저녁 별 같은 사람이이서
때로 풀처럼 낮게 우는 사람이어서
고독이 저 높은 벼랑 위 눈개쑥부쟁이 닮은 사람이어서
어제로 내리는 성긴 눈발 같은 사람이어서
만개의 기쁨과 만개의 슬픔
다 내려놓아서 가벼워진 사람이어서
가벼워져서 환해진 사람이어서
시들기 전에 떨어진 동백이어서
떨어져서 더 붉게 아름다운 사람이어서
죽어도 죽지 않는 노래 같은 사람이어서
# 예전에 위의 시 <내가 아는 그는>을 읽었을 때 누군가를 대입시켜 오래 생각했던 적이 있다. 나중에 나온 류시화의 시선집 <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에는 이 시에 < -故 노무현에게 바침>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이 시집이 나올 때가 MB 대통령 시절이라 행여 불이익이라도 받을까봐 그랬을까. 아니면 너무 좁은 해석으로 시를 한정하는 것을 염려했을까. 암튼 다시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시를 곱씹으며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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