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현역 신종인 - 김재홍

마루안 2019. 5. 23. 19:19



현역 신종인 - 김재홍



방송사라면 진짜 좋은 프로그램 만들어야 하거든
사람들 쾅쾅 들썩거리게 만들어야 하거든
겨우겨우 만들었는데 아무도 모르게 그냥
조용히 사라지면 안 되거든, 돈값은 해야 하거든
이도저도 아니면 차라리 기부금 내는 게 낫거든


윤리까지는 아니라도 최소한 예의는 지켜야 하거든
아무리 분 바른 인간 믿을 수 없다지만
하루하루 뼈 빠지게 사는 국민들 좀 쉬자는데
최소한 예의는 지켜야 하는 것 아니냐구
분 바른 놈 분 값 못 하면 그거 인간 아니거든
눈 뜨고 산다고 다 사람 아니거든


오늘 너무 말이 많은데,
어쨌든 내가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 걸
억지로 하면서 살아온 건 없어
새벽부터 새벽까지 아침부터 아침까지
녹화하고 편집하고 음악 깔고 더빙하며 살았다는 것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걸 맘대로 하면서 살았다는 것
그거 하나 위로가 되더라구


여기까지 기웃거리지 않고
오직 프로그램 만들며 살았다는 것
그것 참 위로가 되더라구



*시집, 다큐멘터리의 눈, 천년의시작








서거 - 김재홍



2009년 5월 23일, 오전 9시 30분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이 사망했다
경찰은 사저 뒤편 봉화산을 오르다 자살했다고 했다


그는 1명의 경호원을 대동하고 부엉이 바위에 이르러
들녘을 잠깐 살핀 뒤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담배 있는가?"
"없습니다."
"저기 사람이 지나가네...."


경호원이 고개를 돌리는 순간
뛰어내렸다고 했다
다발성 골절, 척추 손상, 두개골 골절 등
두부 외상이 직접 사인이라고 했다
심폐 소생술로도 초긴급 수술로도
떠나는 그의 발길은 막을 수 없었다고
초췌한 담당 의사가 밝혔다


청와대는 긴급회의 직후 안타깝고 유감이라 말했고
그와 그의 가족이 연루됐다는 뇌물사건을 수사하던 검찰은
기소도 해 보지 못하고 정리하고 말았다


그의 오랜 벗이자 비서실장을 역임했던
문재인 변호사에 따르면,


너무 많은 사람에게 신세를 졌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밖에 없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화장해라
집 가까이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


라는 유서를 당일 새벽 5시 10분에 썼다고 했다


그는 한때 군부독재에 항거한 진보 지식인으로
노동자와 학생의 정당한 주장을 짓밟는
공권력에 저항한 민주 변호사로
무엇보다 똑똑한 우리 동네 형님이었다


그날은 마침 유명 탤런트 여운계 씨가 69세를 일기로 타계했으나,
갑작스런 전직 대통령의 죽음으로
헤드라인 자리는 영영 기대할 수 없었으며,
세계적 경기 침체에 안 그래도 울고 싶던 국민들은
때 맞춰 뺨까지 때려 준 형국이라
너나없이 속 시원하게 울고 또 울었다






# 김재홍 시인은 1968년 강원도 삼척 출생으로 중앙대 문예창작과 및 동 대학원 석사 과정을 졸업했다. 2003년 중앙일보 당선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메히아>, <다큐멘터리의 눈>, <주름, 펼치는>이 있다. MBC에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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