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밤의 이야기 - 유계영

마루안 2019. 5. 22. 22:15



밤의 이야기 - 유계영



장례식장에서 신고 온 남의 구두
발이 큰 사람이 나를 걸어 넘어뜨렸다
친구들이 낭떠러지에서 무럭무럭 떨어지는 사이
나는 보도블록 위로 걸으며
더 깊은 맨홀 속으로 빠지며 움찔거렸지


낮게


도둑맞은 자전거가 어디에서 어디로
내 더러운 발을 운반하고 있는지를
저녁의 골목이 확인시켜주는 것
우리가 어떻게 태어났는지 알려줄까


가로대를 뛰어넘는 높이뛰기 선수와 같았을까
나는 돋움닫기중에 넘어진 무릎일까


조용히


맨홀 뚜껑을 밟을 때마다 눈을 감았지
밤새 운 것이 고양이인지 갓난아기인지 궁금해서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을 때
가로등 아래 구두가 뿔나팔을 불고 있었다


어느 날 너는 치맛단을 찢어 나를 감쌌다
물려받은 기계 주름으로 웃으렴 크게
그날 장례식장에서 신고 온 구두가
틀림없이 내 구두라는데



*시집, 이런 얘기는 좀 어지러운가, 문학동네








아코디언 - 유계영



착하고 외롭게 산 사람들만 불러들여 천국을 건설하겠다는 아이디어는

착하고 외로운 사람의 것이었을까 빌라와 빌라 사이에 의자를 내어놓고 앉아
빌라와 빌라 사이를 벌리는


외로운 노인이 흔해빠진 골목
늘어난 러닝셔츠를 누렇게 적시면서


곧 녹아내릴 눈사람을 생각하는 겨울보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주물공을 생각하는 여름이 좋았다


배꼽까지 빨간 아직은 예쁜 것
풍선을 쥐고 지나가는 예쁘고 어린 것


바람이 불었다 날아가는 붉은색 풍선을
날아가게 두었다 쌓아올린 돌들이 와르륵 무너지면
다시 공들일 것이다 바람일 뿐이므로
움켜쥔 손가락을 하나하나 펼치는 것이
바람의 일이므로


멀리서 한 사람이 걷고 있다
다가오는 것인지 멀어지는 것인지
알 길도 없이 오래도록 제자리에서


두 개의 허파가 천천히 부푸는 것을 느끼면서






# 유계영 시인은 1985년 인천 출생으로 동국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10년 <현대문학> 신인 추천으로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온갖 것들의 낮>, <이제는 순수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얘기는 좀 어지러운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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