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봄, 몸 - 이문재

마루안 2019. 5. 21. 21:50

 

 

봄, 몸 - 이문재
-副詞性 4

 


거기에도 햇빛의 힘 가닿는구나
어지럼증 한바퀴 내 몸을 돌아나간다
기억이 맑은 에너지일 수 있을까
식은 숭늉 같은 봄날이 간다


이 질병의 언저리에 궁핍한
한세월, 봄빛의 맨 아래에 깔린다
죽음이 이렇게 부드러워지다니
이 기억도 곧 벅차질 터인데


햇빛은 지금 어느 무덤에 숨을
불어넣으며 할미꽃 대궁 밀어올리는가
그 무덤들 보이진 않지만
문 밖까지 굴러와 있는 것 같아서
살아 있음은, 이렇게 죽음에게
허약하구나


아픔으로 둥글어지는
젖은 몸, 그리고
조금씩 남는 봄, 자글자글
햇빛이 탄다

 


*이문재 시집, 산책시편, 민음사

 

 

 

 

 

 

분꽃 - 이문재

 


소리내지 못하는 나팔에는 붉은 독이 고인다


큰 어둠 단내 나도록 쥐어짜 한 방울 이슬
껴안으며 분꽃 분하게 자라난다


땡볕에 뻥끗 입 한번 못 벌리고
툭 검은 씨앗을 떨어뜨린다


분꽃
분한 꽃

 

 

 


# 이문재 시인은 1959년 경기 김포 출생으로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82년 <시운동> 4집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시집으로 <제국호텔>, <마음의 오지>, <산책시편>,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 <지금 여기가 맨 앞>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