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겁 - 이영광

마루안 2019. 5. 21. 21:58



겁 - 이영광



먼 곳에 슬픈 일 있어 힘없는
원주 토지문학관의 저녁이다
속 채우러 왔다, 슬리퍼 끌고


해장국이 나오길 기다리며 신문을 뒤적이다
누군가의 소식을 읽고,
아― 이 사람 아직 살아 있었구나!
놀라고 다행스러워하는 마음이 된다


허기에 힘을 내는 것이 우습다가
문득 또, 누군가 내 소식을 우연히 듣고
아― 그 사람 아직 살아 있었구나,
놀라길 바라는 실없는 마음이 돼본다


다행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그만한 용기는 없다
허기는 아무래도 쓸쓸한 힘,
뭘 바라지 못하는 순간이 좋다


밥보다도 더 자주 먹는 이
겁에 의해,
오늘도 무사하지 않았느냐고


무사한 사람,
무사한 사람,
중얼거렸다
겁도 없이
중얼거렸다



*시집, 끝없는 사람, 문학과지성








쉰 - 이영광



한 권을 다 읽어도 주인공들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러시아 소설처럼
흐릿했지만,
쉰이다


남의 살에 더 들어가려고 약을 먹는 늙은 정욕처럼
어지러웠지만,
지천명이다


인간이 되지 못해 괴로웠던 때도 있었고
동물이 되지 못해 괴로웠던 때도 있었다
인간도 동물도 되지 못하는 것일 때 가장 괴로웠다


마실 만큼 마신 것 같은데
아직 잔이 남았나?
쉰 집으로 말라도 여섯 집 반을 더 얹어주는
백번 바둑처럼?


하늘이 인간의 수명을 늘여주는 건
한꺼번에 멸하기 위해선지도 모른다






# 이영광 시인은 1965년 경북 의성 출생으로 고려대 영문과와 동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8년 <문예중앙> 신인상 당선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직선 위에서 떨다>. <그늘과 사귀다>. <아픈 천국>. <나무는 간다>. <끝없는 사람>이 있다. 노작문학상, 지훈상, 미당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고려대 미디어문창과 교수로 있다.